2000년 이후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누구나 아주 적은 비용으로 거의 무제한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법률 시장도 마찬가지다. 예전 같으면 수백만원을 지불해야만 접근이 가능했던 미국 법전(US Code)을 이제는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은 단일 법전 체계 국가다. 미국의 모든 연방 법률은 미국 법전 하나에 다 들어 있다. 미국 법전 제12편에 은행과 은행업에 관한 연방 법률이 모두 담겨 있고, 제12편 제3장에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관한 법률이 들어있다. 제12편 제3장 제1절 제221조에는 ‘은행’의 정의가 들어 있다. 미국 법전은 “은행을 특별히 국법 은행(national banks) 또는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s)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 이외에, 이 장에서 사용하는 ‘은행(bank)’이라는 용어는 주법 은행(state bank), 은행협회(bank association)와 신탁회사(trust company)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국법상 은행에는 주법 은행, 은행협회, 신탁회사, 국법 은행, 연방준비은행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더 이상의 의미 접근은 불가능하다. 이 조항의 배후에는 미국의 역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연방주의의 승리와 제1 미국 은행의 설립
1791년 미국의 초대 재무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설립을 구상한다. 당시 미국은 13개 지방국(주)으로 구성된 느슨한 연방국으로서, 연방보다는 지방(주)의 권력이 우위에 있었다. 미국의 주를 오늘날에도 ‘state’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국 독립 당시 13개 식민지가 별개 국가(state)였기 때문이다. 연방국은이중 국가로서 연방국이라는 큰 상자 안에 지방국이라는 작은 상자가 들어있는 형태다. 하지만 연방과 지방의 관계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다.
미국 은행은 최초의 국법 은행, 즉 최초로 ‘연방법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었다. 여기서 ‘national’은 ‘민족적’이 아니라 ‘연방적(전국적)’이라는 의미다. 해밀턴이 국법 은행의 설립을 지지했던 이유는 국법 은행이 연방 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을 높여주고, 13개 지방국 간 무역과 상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연방 정부의 전쟁 부채를 상환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밀턴의 주장은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이 이끄는 농업주의자와 해석주의자(constructionist)의 공격을 받았다. 여기서 농업주의자란 국부의 원천을 농업이라고 생각하는 남부의 대농장주를 말하고, 해석주의자란 연방헌법의 엄격한 해석을 통해 연방의 권한 확대를 막고자 하는 분권주의자를 말한다. 그들은 미국 헌법이 연방의회에 ‘은행’ 설립 권한을 명시적으로 부여하지 않았고, 국법 은행의 설립이 지방국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으며, 국법 은행이 상공업자 등 소규모 집단에만 이익을 주기 때문에위헌이라고 생각했다.
독점은행의 폐해
결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국법 은행의 출현은 13개 지방국을 긴장하게 했고, 각각의 지방국은 자신의 고유한 입법 권한을 동원해 주법 은행을 설립했다. 미국 은행은 국법 은행이자, 연방 정부 신용의 원천이며, 유일하게 특허를 받은 주간 은행(in-terstate bank)이었다. 즉, 전국적 은행이었지만 중앙은행은 아니었다. ‘진짜’ 화폐는 주화(금화·은화)였고, ‘가짜’ 화폐(은행권)는 귀금속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보증됐다.
권력이 주어지면 행사하고 싶은 법. 미국 은행은 시장 지배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예를 들어, 미국 은행의 고객이 주법 은행권을 미국 은행에 예치하면, 미국 은행은 이것을 모아두었다가 일시에 주법 은행에 제시해 금의 인출을 요구했다. 주법 은행에서 거액의 금이 인출되면, 주법 은행의 은행권 발행 능력이 제한되고, 적정한 수준의 정화(금) 준비금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동성 위기에 빠진 주법 은행이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811년 지방국과 주법 은행은 미국 은행의 특허 갱신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연방의회에서 미국 은행 특허 연장이 좌절됐다. 1811년은 나폴레옹전쟁이라는 국제전의 그림자가 북미 대륙에 드리워지던 시기였는데, 미국인은 영국과 전쟁보다 미국 은행의 깡패 짓을 더 힘들어했을 정도였다.
팽창주의의 승리와 제2 미국 은행 설립
1812년 미국과 영국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비 조달이 곤란해지자 국법 은행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재점화됐다. 하지만 새로운 국법 은행 창설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였다. ‘1812년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일부 사람은 전쟁 초기 미국이 부진했던 원인이 약한 중앙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815년에 제임스 먼로 국무장관은 매디슨 대통령에게 국법 은행이 설립되면 지방국의 상업 부문이 연방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방 정부의 권한이 확대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연방 정부의 화폐 및 금융 시스템에 대한 통제 욕구와 ‘북부 자본가, 남부 팽창주의자’의 경제성장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1812년 전쟁의 승리 이후 광대한 서부 지역이 영국의 방해 없이 백인 정착민에게 개방됐고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남부의 팽창주의자는 서부의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연방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북부 자본가는 북미 시장의 통합을 위해서는 해밀턴의 은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석주의자는 국법 은행이 패권적이며 지방국의 주권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팽창주의자가 의회를 장악하면서 1816년 미국 은행 재설립 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했다. 제2 미국 은행은 상당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주법 은행과 달리 미국 어디든 지점을 만들 수 있었다. 전국적 차원에서 은행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독점권을 누렸다. 연방 정부는 미국 은행 주식의 5분의 1을 보유했고, 미국 은행 이사의 5분의 1을 임명했으며, 연방 정부 자금을 미국 은행에 예치했다. 미국 은행은 자신의 신용 증서(약속어음)인 은행권을 지급하고 연방 채권를 매입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이 설립한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은 미국 은행과 매우 닮았다. 조선은행은 특허에 의해 설립된 초대형 상업은행이자 정부(조선총독부)의 충실한 국고 은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