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어떤 제도라도 모든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연금만큼 전 국민이 싫어하는 제도는 없어 보인다. 정부가 직접 운용하는 공적 제도를 통해 은퇴 후전 국민의 기본 생활을 유지해 주겠다는 1988년 도입 당시 취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사회적 갈등의 원천이 돼버렸다. 이미 국민연금을 받는 세대는 가입 기간이 짧기에 연금 수령액이 충분치 않아 ‘용돈 연금’ 아니냐는 불만이 있고, 젊은 세대는 기금 고갈로 미래 세대의 부담이 늘어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본인이 연금을 수령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갈등은 세대 간은 물론 같은 세대 안에서도 만만치 않다.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는데, 고소득자의 연금 수령액을 줄이는 대신, 이를 저소득자에게 이전하는 구조다. 국민연금 납입 상한 소득은 600만원 전후인데, 이들은 전적으로 소득에 비례해 지급하는 연금에 비해 4분의 1에 가깝게 수령액을 손해 보게 된다. 사회복지학자가 주류인 소득 보장론자조차도 소득재분배 기능이 너무 강하다고 걱정할 정도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세계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소득재분배 기능이 강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국민연금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저소득자의 소득 보장 책임을 연금 가입자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지적하며, 정부 재정 투입을 통해 저소득자 소득 보장을 실현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문제는 소득재분배 기능조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후 빈곤율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앞으로도 개선 가능성이 작게 평가된다. 저소득층이 소득재분배를 통해 혜택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25년 이상 국민연금에 가입해야만 하는데, 비정규직, 영세 사업자 등이 많아 가입 기간이 절대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는 노후 빈곤층은 제대로 된 혜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소득재분배는 고소득층에 가혹하고, 저소득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초연금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는 2007년 노무현 정부의 개혁 당시, 60%였던 소득 대체율을 40%로 깎으며 기초연금을 도입했다. 처음엔 10만원이었던 기초연금이 대선을 치를 때마다 10만원씩 늘어, 이번에 발표된 정부 개혁안에 따르면,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매달 40만원씩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2024년 기준 기초연금 지급액은 24조원가량으로, 국민연금 지급액의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다. 국민연금을 충실하게 납부한 사람 입장으로서는 젊었을 때 열심히 보험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기초연금을 못 받게 되니,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국민연금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시점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국민연금 기금은 고갈되며, 고갈 이후에는 연금 급여 부담이 오롯이 다음 세대로 전가된다. 내는 것보다 더 많이 받게 설계된 제도의 특성 때문이다. 여기에 기초연금까지 지금처럼 지급한다고 치면 기금 고갈 이후에 모자라는 돈은 최소 국내총생산(GDP) 7~8%가량, 현재 가치로는 200조원가량이다. 다음 세대 가입자의 보험료든, 다음 세대 정부의 재정이든 매년 삼성전자 시총의 절반가량을 투입해야 연금제도가 지속 가능하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아니다. 2007년 연금 개혁의 주역인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 제도를 “부도덕한 제도”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팽개치고 가고, 우리 새끼들한테서 보험료 뜯어내는 제도”라는 발언까지 했다. 다음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기면서도, 앞 세대는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그는 소득 대체율 삭감과 함께 보험료 인상까지 단행해 지속 가능한 연금제도를 만들고자 했으나 정치권의 벽에 막혀 소득 대체율 삭감만 실행된 절반의 개혁을 달성했다. 본인의 정치적 지지층인 진보 세력에게 ‘손절’당하면서까지 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덕분에 우리 사회는 20여 년의 시간을 벌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허송세월하며 낭비해 버렸다.
국민연금은 법에 따라 5년에 한 번씩 재정 계산, 즉 건강검진을 받는다. 2007년 개혁 이후 총 네 번의 재정 계산이 있었고, 재정 계산 주기가 마침 대통령 임기와 맞아떨어지기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연금 개혁은 필연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됐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연금 개혁이 일어난 직후여서 추가 개혁 동력이 전무했고, 박근혜 정부는 공무원 연금 개혁을 단행했다. 어찌 보면 고통 없는 개혁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기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가을 종료된 국민연금 제5차 재정 계산 결과, 기금 고갈이 더욱 앞당겨진다는 결과가 나오며 윤석열 정부의 연금 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지난 17년간 연금 개혁 논의는 이념의 대리전과도 같았다. 소득 대체율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득 보장론자, 즉 진보 진영 전문가와 재정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정 안정론자, 즉 보수 진영 전문가가 팽팽히 맞서며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학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할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이 간극을 메워 현실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정치인의 책무다. 실제 개혁의 주역이 돼야 할 정치권과 정부는 전문가가 단일 안을 도출하지 못했다는 편리한 핑계를 대며 뜨거운 감자인 연금 개혁 논의에서 한발 빠져 끝나지 않을 전문가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단적인 사례가 지난 4월 공론화위원회의 핵심 의제다. 진보 진영이 낸 1안, 즉 ‘더 내고 더 받기’와 보수 진영의 2안, 즉 ‘더 내고 그대로 받기’가 500인의 시민 대표단에 의해 평가받았고, 1안이 56%의 지지를 받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국회에서 여야가 본격적인 논의를 했으나 소득 대체율 1~2% 간극을 줄이지 못하고 결국 제21대 국회는 문을 닫았다.
꺼져가던 연금 개혁의 불씨는 9월 4일 정부가 개혁안을 제안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듯 보였다. 각론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노무현 정부의 개혁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정부 개혁안을 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연금 개혁 논의의 불씨가 되살아났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통상 연금 개혁은 정부 지지율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상당히 악화한 당시 정부 지지율하에서 정부가 자체 개혁안을 내는 건 과거 정부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종료된 국정감사 결과를 살펴보면,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치권은 연금 개혁을 여전히 이념 전쟁의 대리전으로 보고 있음이 명확해졌고, 연금 개혁 그 자체보다는 지지 세력의 유불리에 따라 줄을 서는 행태를 여전히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논의는 복건복지위원회 산하에서 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과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의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며 개점휴업 상태이기도 하다.
연금 개혁은 어떤 사회에서든 어려운 개혁 중 하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과거 세 번의 연금 개혁을 완벽하진 않더라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2007년 노무현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그리고 2015년 박근혜 정권의 공무원 연금 개혁이 그것이다. 세 번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정치 지도자가 앞장서서 본인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2024년 현재, 이런 용기 있는 정치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전문가 뒤에서 말의 향연만 하고 있을 건가. 정치권의 각성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