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it, make it, do it, makes us/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8월 23일 저녁, 로봇 목소리처럼 샘플링된 이악구가 나오는 순간, 경기 고양종합운동장을 메운 3만여 명의 관객에게서 탄성과 환호, 절규에 가까운 환성이 이어졌다. 미국의 힙합 아이콘 카녜이 웨스트가 이곳에서 연 공연의 한 장면이고, 저 노래는 프랑스의 세계적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의 곡을 샘플링한 카녜이 웨스트의 대표곡 ‘Stronger’다.
강해지고, 나아지고, 빨라지고, 강해져야 한다는 주문 같은 가사는 문화 도시, 음악 도시를 추구하는 한국과 세계의 모든 도시를 향한 외침 또는 주마가편처럼 느껴진다.
카녜이 웨스트의 ‘공연’이라고 했지만 웨스트의 새 앨범에 대한 ‘리스닝 익스피리언스’라는 타이틀을 단 행사였기 때문에 ‘음악 감상회’ 형식이 아닐까 생각한 팬도 다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연 후반부, 웨스트가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던지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튀어나와 2시간 넘는, 이례적으로 열정적인 ‘본격 공연’을 선사하자 시쳇말로 ‘난리’가 난 것이다.
고양종합운동장(또는 여느 시립 운동장의 특징 중 하나인) 흙바닥에서 진행한 이 ‘힙한’ 공연은 웨스트 본인이 자기 유튜브 채널에 2시간 넘는 실황 녹화를 통째로 업로드했고 200만 회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으며 수천만 명의 힙합 팬, 음악 팬에게 화제성 있는 콘텐츠로 타전됐다. 세계 최대의 콘서트 곡목 공유 플랫폼인 ‘setlist.fm’에도 자연스레 ‘Ye(카녜이) at Goyang Stadium, Goyang-si, South Korea’라는 항목이 생겨, 이날 선보인 54곡의 리스트가 공개됐다. 시립 운동장 흙바닥에서 열린 ‘이상한’ 공연이었지만 문화 현상을 낳은 ‘이상적인’ 공연이기도 했다.
시민의 문화·체육 시설로서 대외 활용도가 제한적이었던 고양종합운동장은 단 하룻저녁의 이벤트를 통해 ‘Goyang’이란 여섯 글자를 세계 콘서트 시장의 지도에 새겨버린 것이다. 이후 10월 이곳에서 세븐틴, 엔하이픈의 콘서트가 이어지고 내년 콜드플레이 6회 내한 공연도 발표되면서 고양종합운동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 명소로 단박에 자리매김하는 모양새다.
고양시는 고무됐다. 상권이 예전 같지 않던 운동장 인근 대화역 일대에는 대형 콘서트에 즈음해 젊은 국내외 힙스터 음악 팬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12월 초, 고양시의 대형 공연 유치 사업에 관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큰 규모의 포럼도 준비 중이라는 후문이다.
인천 부평구도 ‘문화 도시 부평’이란 슬로건 아래 각종 음악 행사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동두천 락 페스티벌, 통영국제음악제, 전주세계소리축제⋯. 팝, 록, 클래식, 국악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 전국의 지방 자치 단체가 지역 브랜드를 선뜻 결합해 마케팅한다. 최근 몇 달 사이 필자는 광주광역시를 두 번 찾았는데 ‘2024 ACC 월드뮤직페스티벌– 광주’와 ‘제3회 광주버스킹월드컵’의 심사 및 취재를 위해서였다. 국제적인 스케일로 펼쳐지는 행사다. 올해 경주에서 처음 열린 ‘황금카니발 2024’처럼 음악계의 젊은 기획이 지자체의 협조와 만나 이뤄지는 행사도 신선하다. ‘음악 도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도시들이 꿈꾸던 청사진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이런 지역 음악 축제가 ‘지방의 관제 행사’와 혼동된 개념으로 시민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다. 일부 시민이나 지자체가 유료 음악 행사에 대해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하라’ ‘장년층 인기 가수를 초청하라’는 주문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축제의 성격과 별개로 막무가내로 이런 요구가 이어진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한편으론 최근 방탄소년단(BTS) 멤버의 고향 도시에서 그들의 지식재산권을 무단으로 이용한 조형물이나 사인을 만들었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 도시, 음악 도시의 꿈은 그 꿈을 꾸기도, 실현하기도 절대 간단하지 않다.
이쯤 해서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텍사스주 오스틴, 영국 리버풀 같은 국제적 음악 도시를 살펴볼 만하다. 리버풀은 비틀스라는 강력한 아이콘을 보유한 도시. 내슈빌은 긴 미국 음악사를 관통하는 다양한 유산을 보유했으며 음악 산업에서 현재 진행형의 무게감을 보유한 도시다.
자칭, 타칭 ‘세계 라이브 음악의 수도’로 불리는 텍사스주 오스틴은 주목할 만한 경우다. 오스틴은 원래 그다지 음악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블루스, 컨트리, 록이 융성한 텍사스주의 주도라는 이점이 있고, 윌리 넬슨이나 재니스 조플린의 활동과 큰 연관이 있긴하지만, 미국 내 다른 도시에 비해 존재감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오스틴 파워’의 중심에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뮤직 페스티벌(이하 SXSW)’이 있다. 1987년 소규모로 시작해 2010년대 들어 프랑스 칸의 미뎀(MIDEM)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국제 대중음악 박람회로 성장했다.
오스틴 시내에는 (팬데믹 이전 기준) 약 250곳에 음악 공연장이 자리했다. 미국 내 일 인당 음악 공연장 수 1위 도시다. SXSW 기간이 되면 시내 몇 개 블록이 차단되고 바, 당구장까지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SXSW는 유료 행사다. 세계 음악계 거물이 몰려드는 각종 콘퍼런스, 뜨기 직전의 가장 뜨거운 신인을 선보이는 쇼케이스가 이어지기 때문에 티켓 가격이 비싼 유료 행사임에도 국제적으로 손님이 몰려든다. 일주일간 약 2000개의 공연을 볼 수 있는 행사는 세계 어떤 다른 곳에도 없다. 오스틴은 SXSW를 중심에 둔 음악 산업으로 매년 18억달러(약 2조5000억원)의 경제 효과를 창출한다. 이삼 일 동안 예산에 맞는 몇 명의 국내외 음악가를 불러 수천~수만 명 관객을 유치한 뒤 내년을 기약하는 일반적 음악 페스티벌과는 규모도, 성격도 다르다. 신인 음악가는 차제에 오스틴 공연을 중심으로 텍사스주나 미국 서안 투어, 전미 투어를 잡기도 한다. 미국과 세계 음악 산업의 모굴이 오스틴을 하나의 명품 브랜드처럼 인식하고 네트워크의 지정학적 중심으로 생각한다. 이런 이례적 자리매김에는 SXSW를 단순히 시끄러운 음악 축제나 지방 행사가 아닌 국제적 박람회로 이해하고 강력히 응원하는 오스틴 시민의 묵묵한 지원이 뒷받침됐다.
수준 높은 음악가 꾸준히 배출해야 음악 도시로 성장 가능
음악 도시의 조건에는 그 지역 출신의 좋은 음악가가 꾸준히 양성되는 것도 있다. 영국 맨체스터의 존재감은 의미심장하다. 1960년대에는 비틀스를 배출한 라이벌 도시 리버풀에 가린 듯했지만, 이후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조이 디비전을 거쳐 1990년대 세계를 뒤집은 뒤 현재까지 아이콘으로 자리한 오아시스를 양산했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세계 음악 팬과 평단에 널리 통용되는 장르명인 ‘매드체스터(Madchester)’라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맨체스터의 세 번째 철자 ‘n’을 ‘d’로 바꿔 강렬하고 몽환적인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매드체스터의 발흥은 맨체스터 클럽 음악계의 발전, 여러 장르와 문화의 섞임을 용인하는 자유로운 지역 청년 문화가 바탕이 됐다. 지역에서 자생하는 새로운 청년 문화는 ‘시끄럽고 퇴폐적’이라는 오해를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문화가 10년, 20년, 30년 뒤 도시의 핵심 문화유산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면밀히 들여다봐야할 것이다.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를 규모 면에서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오아시스의 재결합 투어 가운데서도 5일간 이어지는 내년 7월 맨체스터 ‘홈커밍’ 공연이 가장 많은 화제가 될 듯하다. 이는 맨체스터에 대한 세계의 주목으로 다시 이어질 전망이다. 몇 년 전 필자와 만난 스티브 애들러 전 오스틴 시장(2015~2023년 재임)은 ‘오스틴을 이상한 대로 두라(Keep Austin Weird)’는 시의 표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상함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이 개성과 가치를 지켜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