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무대였던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유색인종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불과 최근 일이다. 1970년대 흑인 배우와 크루가 주도한 뮤지컬 ‘더 위즈(The Wiz)’가 성공을 거두면서 흑인이 점차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흑인 배우가 브로드웨이 주무대에 서게 된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당선과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 증가 등이 맞물리며 점점 더 많은 작품에서 흑인 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흑인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그러나 아직 동양인이 설 자리는 좁다. 브로드웨이에서 동양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동양인이어야만 하는 역할’ 혹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역할’뿐이라고 할 정도로 한정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고 당당히 브로드웨이 작품 주인공 자리를 꿰찬 주인공이 있다. 2019년 토니상을 받은 ‘하데스타운(Hadestown)’에서 동양인 최초로 주인공 오르페우스 역을 맡은 이해찬(27·미국명 티머시 이)씨다.
최근 미국 뉴욕 맨해튼 48번가의 월터 커 극장에서 뮤지컬 배우 이해찬씨를 만나 인터뷰했다. 이 배우는 올해 ‘하데스타운’ 미국 투어 공연에서 아시안 최초로 주인공 오르페우스 역을 맡아서 주목받았다. 본공연에서는 오르페우스 역의 언더스터디(예비 배우)와 앙상블 ‘워커’ 역으로 출연 중인데, 오르페우스 역을 맡지 않을 때는 워커 역으로 매일 무대에 선다. ‘하데스타운’은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고자 하데스의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2019년 토니상을 받았다.
뮤지컬 배우의 꿈은 언제부터 가지게 됐나.
“열한 살 때 미국에 왔는데, 아무 준비 없이 온 터라 영어를 잘 못했다. 그래서 인종차별 왕따를 심하게 당했다. 맞기도 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 이상하게 고등학생인 형은 하교하고 돌아올 때 행복해 보이더라. 도대체 무엇이 형의 고등학교 생활을 행복하게 하나 살펴봤더니 합창단, 극단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더라. 당시에 ‘아, 미국에서 저 집단에 들어가면 불행하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가 입학하자마자 그 동아리에 들어갔다. 동아리는 내게 미국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뜻함’ 을 느끼게 해줬다. 나를 괴롭히지 않고 존중해줬다. 이민 온 지 3년 만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때부터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매료됐는데, 사실 뮤지컬은 꿈이라기보다는 나의 ‘도피처’ 같았다.”
고등학교 때 처음 시작했으면 대학 입시 과정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맞다. 그래서 경쟁률이 치열한 곳은 당연히 떨어졌고 캘리포니아주립대 풀러턴캠퍼스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은 1학년이 140명으로 입학하지만, 졸업은 8~12명만 할 수 있다. 매 학기 오디션을 보는데, 관문을 통과해야 졸업할 수 있는 악명 높은 학교다.
거기서 늘 ‘너는 실력이 안 되니 열심히 해야 한다’ ‘너를 위한 역할이 준비돼 있지 않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시작이 늦었으니 죽기 살기로 해야겠다 싶어서뮤지컬에만 전념했다. 하루에 10~11시간씩 연습했다.”
‘ 하데스타운’ 배역은 어떻게 따냈나.
“대학 졸업 후 1년에 오디션을 200개 보러 다녔다. ‘하데스타운’도 내가 오디션 보러 다닌 작품 중 하나다. 처음에는 투어 자리에 붙어서 경력을 쌓다가 또 한 번 시험을 쳐서 본공연까지 하게 됐다.”
브로드웨이에서 동양인 최초로 오르페우스 역할을 언더스터디 하고 있다.
“사실 동양인은 오디션 볼 기회조차 많이 없다. 우리에게 맞는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오디션을 1년에 200개 정도 보는데, 그중 190개는 백인이 주인공이다. 내가 시작한 2015년만 하더라도 동양인이 차지할 남자 주인공 역할은 없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도 앙상블 춤꾼, 웃기는 코미디언 역할, 아시안이어야만 하는 역할이 다였다. 심지어 유명한 ‘미스사이공’의 아시안 캐릭터인 ‘엔지니어’ 역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해 논란도 있지 않았나.
그래서 ‘하데스타운’ 같은 토니상 수상 작품, 그래미상 수상 작품, 게다가 브로드웨이에서 6년째 공연하고 있는 뮤지컬에 주인공인 오르페우스 역할을 한다는 건 큰 영광이다. 오르페우스 언더스터디도 굉장한 영광이지만, 사실 ‘하데스타운’에서 매일 워커로 공연하고 있다는 것,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 배우로 살아남고 있다는 자체가 기쁘다.”
최종 목표가 궁금하다.
“토니 어워즈 뮤지컬 남우주연상을 받고 싶다. 동양인 남자 최초가 돼도 좋고, 그게 아니어도 좋다. 아시안 이민자가 토니상을 받으면 그 자체만으로 뮤지컬 업계에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후배 아시안 배우들이 더 편한 환경에서 뮤지컬을 했으면 좋겠다. 오디션 만큼이라도 자유롭게 보는 날이 오면 좋겠다.”
르포 뉴욕 수입 견인하는 브로드웨이
“매일매일이 축제”…코로나19로 멈췄던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부활
미국 뉴욕 맨해튼 48번가의 월터 커 극장 앞. 최근 찾은 이곳은 2019년 토니상을 받은 작품 ‘하데스타운’을 보기 위해 모인 관객으로 북적였다. 19도 정도의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극장 안은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관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채워졌다. ‘하데스타운’ 관계자는 “요즘 매 공연 전석 매진”이라면서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관객이 가득 들어찬다”라고 말했다. 미국 최고의 인기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라이온킹’을 공연하는 극장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라이온킹’은 10월 23~29일(이하 현지시각) 일주일 동안 166만3908달러(약 23억2015만원)를 벌어들였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기간 문을 닫으며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브로드웨이는 최근 들어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브로드웨이가 비로소 코로나19 후유증에서 벗어나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아직 팬데믹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브로드웨이는 확실히 상승세인 것으로 보인다.
2023-2024시즌 관객은 약 1230만 명으로 역대 최다였던 2018-2019시즌(1477만 명)의 83% 수준까지 따라왔다. 올해는 지난 시즌보다 더 많은 관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2024-2025시즌 19주 차를 맞은 10월 초 기준, 브로드웨이의 총관객은 474만151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8% 증가했다.
브로드웨이가 다시 활성화하면서 뉴욕시도 웃고 있다. 브로드웨이 공연 산업은 뉴욕시 경제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2020년 3월부터 2021년 9월까지 브로드웨이 극장이 문을 닫는 동안 144억달러(약 20조794억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브로드웨이 관광객 중 상당수가 관객인데, 이들은 뮤지컬 한 편만 보고 떠나지 않는다. 이들이 뉴욕에서 숙박, 식음료, 교통 등에 쓰는 비용은 모두 뉴욕의 수입으로 떨어진다. 시카고에서 왔다는 한 관광객은 “어제는 ‘알라딘’을 봤고 오늘은 ‘라이온킹’을 보러 뮤지컬 투어를 왔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