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바젤 노바티스 캠퍼스에서 10월 31일 ‘제11회 한·스위스 생명과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병철 기자
스위스 바젤 노바티스 캠퍼스에서 10월 31일 ‘제11회 한·스위스 생명과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병철 기자

스위스는 전통 제약 산업의 강자다. 노바티스, 로슈 같은 세계적인 제약·바이오 기업이 본사와 연구소를 두고 있다. 스위스는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선정하는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 14년 연속 세계 1위다.

이런 스위스가 최근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 10월 31일(이하 현지시각) 스위스 바젤에 있는 노바티스 캠퍼스에서 열린 ‘제11회 한·스위스 생명과학 심포지엄’은 제약 산업의 강자인 스위스와 정보기술(IT) 분야의 강자인 한국이 어떻게 시너지를 낼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스위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스위스넥스(Swissnex)가 공동 주관하는 국제 학술 행사다.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이날 행사에 기조 연사자로 나선 아자드 보니 스위스 로슈 수석 부사장은 “로슈의 신약 파이프라인(신약 개발 과제) 중 절반 이상이 스타트업과 협력을 기반으로 개발되고 있다”며 “한국은 과학기술의 혁신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슈는 한국의 의료 영상 분석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인 뉴로핏과 협력하고 있다. 뉴로핏은 지난해 로슈의 스타트업 혁신 프로그램 참여 기업으로 선정됐다. 뉴로핏은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분석해 알츠하이머병을 예측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뉴로핏은 로슈가 가진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판로 개척과 연구개발(R&D) 지원을 받고 있다.

로슈와 뉴로핏의 협력은 스위스의 제약 산업 경쟁력과 한국의 IT 경쟁력을 하나로 합친 대표적인 사례다. 디지털 헬스케어 등이 바이오산업에서 중요해지면서 한국과 스위스의 협력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거지를 둔 비스(Wyss)센터에서 근무하는 이규화 뉴로AI그룹 리더는 “한국은 전자공학 분야에서 엄청난 강점을 갖고 있는 나라”라며 “한국과 협력을 통해 뇌 질환 조기 진단과 치료를 위한 장치 개발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그룹 리더는 “스위스의 개방적인 연구 환경과 한국의 혁신적인 기술을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학계가 이뤄낸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가 의료 현장에 적용되려면 다학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성과 내려면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 필수

스위스가 제약·바이오산업에서 발 빠르게 혁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픈이노베이션이다. 오픈이노베이션은 제품 개발부터 산업화까지 모든 과정을 기업, 연구소와 같은 외부 기관과 공유하는 방식이다.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성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어 제약 산업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회계 법인 딜로이트가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신약을 개발한 281개 글로벌 기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오픈이노베이션 모델에서 신약 개발 성공률은 34%에 달한다. 반면 한 기업 내부에서만 이뤄진 연구에서는 성공률이 11%에 머물렀다.

스위스는 제약·바이오산업에 오픈이노베이션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피 셀니 스위스이노베이션 부사장은 “스위스의 혁신 센터(Innovation Park) 6곳은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소통을 돕는 공간이자 연구자의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탄생하는 곳”이라며 “혁신 센터는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가 꾸려져 내부에서 지속적인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이 열린 노바티스 캠퍼스도 2020년부터 외부 기업이 입주해 오픈이노베이션을 위한 자생적인 생태계를 마련했다. 바젤 지역엔 노바티스 캠퍼스와 함께 로슈 캠퍼스, 메인 캠퍼스 등 여러 협력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한국 기업인 패티앱젠, 프리클리나, 노을 등이 이미 입주해 유럽 진출의 기회를 찾고 있다.

노바티스 캠퍼스가 있는 바젤 혁신 센터는 2029년까지 인프라를 개선할 계획이다. 바젤 혁신 센터는 현재 기업 40여 곳이 입주해 있으며, 연구 기관은 12곳이 참여할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여기에 11만㎡ 규모의 인프라 구축이 추가로 완료되면 더 많은 글로벌 기업이 입주할 전망이다.

스위스의 여러 지방자치단체도 적극적이다. 바젤시는 인근 도시인 쥐라, 바젤란트샤프트와 함께 기금을 마련하고 혁신 센터 입주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바젤시에 따르면, 스타트업 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베이스런치(BaseLaunch)를 통해 현재까지 24개 기업에 6억달러(약 8265억원)를 투자했다. 콘라딘 크래머 바젤 시장은 “베이스런치를 비롯해 혁신 기술 개발 지원 프로그램 데이원(DayOne) 등을 운용하고 있다”며 “바젤에서 혁신적인 제약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투자금 확보가 그만큼 쉬운 덕분”이라고 말했다.

스위스의 오픈이노베이션은 스위스 국경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 기업과 스타트업에 손을 내민 것처럼 국경 밖으로도 적극적으로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을 위해 한국에서는 기업과 대학, 정부 기관에서 수십 명의 전문가가 스위스를 방문했다. 이들은 취리히와 로잔을 방문해 스위스 현지 연구 기관과 병원, 대학 등을 둘러보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취리히의 원헬스연구소와 발그리스트대병원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은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AI), 신경공학 분야에서 양국의 협력 방안을 의논했다. /이병철 기자

동물에게서 인간 질병 해결책 찾는 취리히대 원헬스연구소

대표적인 곳이 스위스 취리히대 동물병원이 운영하는 원헬스연구소(One Health In-stitute)다. 원헬스는 사람과 동물, 자연의 건강이 서로 연계돼 있어 사람의 건강을 지키려면 다차원적인 협력이 필요하다는 개념이다. 동물과 자연에서 사람 질병을 치료할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헬스 개념은 야생동물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도 원헬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구에 나서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인프라는 부족하다. 원헬스 연구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는 물론, 전 세계 연구자의 협력이 중요한 분야다. 대표적인 사례는 항생제 내성 문제다. 항생제 오남용으로 나타나는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되면 치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9년 항생제 내성균 감염으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 수는 127만 명에 달하며, 2050년에는10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원헬스연구소는 전 세계에서 데이터를 수집해 항생제 내성균 지도를 만들고 있다. 사람에게서 발견된 항생제 내성균뿐 아니라 동물이나 하천에서 얻은 데이터까지 모두 조사 중이다. 전 세계 항생제 중 73%가 가축용으로 판매되고 있다. 가축이나 하천으로 흘러간 항생제로 인해 나타난 항생제 내성균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로라 투쇼스 루딘 원헬스연구소 교수는 “유럽에도 원헬스라는 이름을 가진 기관이 3~4곳에 불과하지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며 “원헬스는 전 세계적인 협력이 필요한 만큼 협력 네트워크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원헬스연구소가 구축하고 있는 항생제 내성균 데이터베이스도 북한 지역의 데이터는 확보했으나, 한국은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항생제 내성균 관리 체계는 우수하다고 인정받고 있으나, 동물이나 환경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뒤처진 셈이다. 아직 한국은 원헬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 기관은 없고, 개별 연구자만 나서고 있다. 막스 가스만 취리히대 수의생물학연구소 소장은 “한국 과학계도 원헬스에 관심을 갖고, 정부 차원에서 연구 기관 설립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며 “감염병 예방과 보건 증진을 위해서는 전 세계 연구자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사과학자 모범 답안, 스위스에 있다

한국이 주목하고 있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인프라도 스위스에서 찾을 수 있다. 취리히에서 근골격계 질환을 전문으로 다루는 발그리스트대병원은 의료 기술혁신을 위한 발그리스트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과학자와 공학자가 별도의 연구실을 갖추고,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필요한 미충족 의료 수요를 발굴하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협력하는 공간이다.

세바스티아노 카프라라 디지털의학유닛장은 “발그리스트대병원은 정형외과, 척수, 마취학, 교정, 류마티스 같은 각 분야에 맞는 연구 그룹이 별도로 구성돼 있다”며 “의사와 과학자, 공학자를 연결해 주는 연락 담당자도 별도로 준비돼 있다”고 소개했다.

의사가 기술 개발에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자체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새로운 의료 기술 개발을 위한 탄탄한 인프라(기반 시설)도 장점이다. 실제 환자를 수술하면서 얻는 모든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는 클라우드(가상 서버)가 대표적이다. 발그리스트대병원은 미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의 후원을 받아 첨단 클라우드 시스템을 구축해 의료 기술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파비오 카를로 OR-X(수술실-X) 연구유닛장은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고성능 컴퓨터 네트워크로 수술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술실 내부에서 이뤄지는 모든 움직임을 디지털화해 연구와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며 “외과 의사에게 필요한 교육과 함께 수술 환경에서 필요한 기술을 실험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안 엘리아스 슈나이더 스위스 바젤대 이사는 “선진국은 고령화, 저소득 국가는 인구 증가로 뇌 질환 환자가 늘어나고 있어 전 세계적인 의료 부담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위스와 한국의 협력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바젤(스위스)=이병철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