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베로 로소(Gambero Rosso)의 트레 비키에리(Tre Bicchieri)를 받았다고요? 대단한 와인이군요!’
이탈리아 와인 애호가라면 이 암호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다. 감베로 로소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와인과 음식 전문 미디어이고, 트레 비키에리란 세 개의 와인잔, 즉 최고점을 받았다는 의미다. 감베로 로소는 매년 이탈리아 와인을 평가해 한 개부터 세 개까지 잔의 개수로 그 품질을 평가한다. 그런데 왜 하필 미디어 이름이 붉은 새우를 뜻하는 감베로 로소일까? 동화 ‘피노키오’ 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감베로 로소는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선술집이다. 동화 피노키오에서 교활한 여우와 고양이는 피노키오를 속여 감베로 로소로 데려가서는 산해진미를 잔뜩 주문해 먹은 뒤 사라진다. 순진한 피노키오가 속아 넘어가는 안타까운 내용이지만, 맛있는 술과 요리가 가득한 감베로 로소를 와인과 음식을 평가하는 매체의 이름으로 삼은 것은 이탈리아인다운 재치와 유머가 아닐 수 없다.
올해 감베로 로소는 약 5만 종의 와인을 심사했다. 지역별 예선을 통과한 와인은 로마에서 결선을 치렀고 그중 498종이 트레 비키에리를 받았다. 상위 1%에 속하니 트레 비키에리야말로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이다. 해마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트레 비키에리 와인 로드쇼가 열리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인 11월 1일에 성공리에 끝났다.
필자는 지난 10월 감베로 로소의 초청으로 로마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트레 비키에리 중에서도 가장 큰 영예인 스페셜 어워드 수상 와인 12종을 시음하고 생산자들을 만나 보았다. 한정된 지면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와인 3종을 소개하고자 한다.
올해의 와이너리│산 레오나르도
산 레오나르도(San Leonardo)는 1786년 게리에리 곤자가 후작이 트렌티노(Trenti-no) 지방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1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르메네르 등을 들여오면서 본격적으로 고급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포도를 유기농으로 재배하며 한 단계 더 품질의 도약을 이뤘다.
이들의 대표 와인은 와이너리 이름을 그대로 딴 산 레오나르도. 최신 빈티지인 2019년산에는 농익은 과일, 시나몬, 후추, 초콜릿 등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깊고 우아한 풍미가 가득하다. 놀라운 것은 로마에서 시음한 1988년산이었다. 36년이나 숙성된 와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아로마가 신선하고 풍성했다. 2019년산도 오래 묵히면 이런 복합 미를 보여주지 않을까 저절로 기대하게 하는 맛이었다.
감베로 로소의 총괄 편집장인 마르코 사벨리코는 “한 해쯤 좋은 와인을 만들 수는 있지만 매년 우수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는 드물다. 그중에서도 역사가 깊고 신뢰할 수 있으며 품질이 일관되고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올해의 와이너리가 될 자격을 갖춘다”라고 선정 기준을 밝혔다. 토스카나의 슈퍼 투스칸 못지않게 트렌티노에도 뛰어난 보르도 블렌드가 있다는 것을 산 레오나르도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올해의 화이트 와인│콜테렌치오 그란 라포아 소비뇽 리제르바
콜테렌치오(Colterenzio)는 알프스산맥 기슭에 자리한 알토 아디제 지방 콜테렌치오 마을에 있는 협동조합이다. 여러 포도 농가가 함께 와인을 만드는 협동조합은 데일리급 와인을 주로 생산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트레 비키에리를 받은 와이너리 중에는 의외로 협동조합이 다수 포함돼 있다.
콜테렌치오는 40여 년 전부터 카베르네 소비뇽과 소비뇽 블랑으로 라포아(Lafoa)라는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어 왔다. 올해의 화이트 와인으로 선정된 그란 라포아(Gran La-foa)는 소비뇽 블랑 중에서도 가장 좋은 포도를 골라 4000병만 소량 생산한 와인이다. 레몬, 라임, 복숭아 등 잘 익은 과일 향이 가득하고 꽃과 허브 향이 어우러져 풍미가 무척 고급스럽다. 로마에서 맛본 1995년산 라포아 소비뇽이 말린 과일, 꿀, 밀랍, 바닐라 등 풍성한 아로마로 가득했던 것을 보면 그란 라포아의 숙성 잠재력은 그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자주 즐기는 소비뇽 블랑의 가볍고 상큼한 스타일과는 전혀 딴판이다. 소비뇽 블랑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마셔봐야 할 명작이다.
올해의 포도 재배자│카시나 폰타나
카시나 폰타나(Cascina Fontana)는 6대째 이어오는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현 오너인 마리오 폰타나는 17세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포도밭과 양조장에서 일하며 몸과 마음으로 와인을 배운 인물이다. 최선의 노력, 꺾이지 않는 인내심, 꾸준한 탐구를 인생의 철학으로 삼은 그는 와인을 만들 때도 인공적인 요소를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을 오롯이 드러내는 정통파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 그의 와인 중에서도 바롤로(Baro-lo)는 트레 비키에리를 여러 차례 수상했을 정도로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타닌이 강해 오랜 병 숙성을 요하기로 유명한 바롤로지만, 카시나 폰타나의 바롤로는 비단결 같은 질감이 입맛을 사로잡고 달콤한 과일 향과 장미, 송로버섯, 담배 등 복합적인 풍미가 우아함의 진수를 보여준다. 바롤로 애호가라면 소장할 가치가 있는 훌륭한 와인이다.
감베로 로소는 전 세계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평가한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역대 가장 많은 아홉 곳이 상을 받았는데 파인 다이닝 부문에서 츄리츄리, 파올로 데 마리아, 부산의 비네토가 포크 두 개를 받았다. 피자 부문에서는 마리오네가 국내 처음으로 최고점인 피자 세 조각을 받았다. 어느덧 겨울의 문턱이다. 이번 주말엔 이탈리아 와인과 음식으로 가을을 맛있게 마무리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