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사람이 바둑을 둔다고 화제가 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제 AI는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AI가 척척 가르쳐준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AI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는 등 다양한 창작 활동도 할 수 있다. AI는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단숨에 흡수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AI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지만 아직은 엉뚱한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너 바보야?’ 하고 물어보면 감정을 절제하는 신사처럼 정중하게 사과한다. AI가 감정을 느낄 리 없지만 인간의 기분에 맞춰 대응하는 능력이 점점 더 발전할 것이다.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AI가 앞으로 인간을 얼마나 더 닮아갈지 궁금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생명공학과 AI가 결합한 레플리컨트, 복제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진다. 인간이 하기 싫은 일,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맡아 하는 그들은 태어나는 방법만 달랐을 뿐, 사람과 똑같다. 느끼고 생각하는 그들은 자기만의 과거와 경험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억은 인위적으로 입력된 것이고, 그들의 수명은 단 4년이다.
데커드는 도망친 레플리컨트를 즉결 처형하는 복제 인간 사냥꾼, 블레이드 러너다.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해 온 그들, 미움과 사랑, 공포와 슬픔까지 느끼는 그들을 죽이는 일이 괴롭다. 그들은 정말 사람과 다른가? 그야말로 인간과 인공의 경계, 날카로운 칼날 위를 뛰어다니는 기분이다. 일을 그만두고 싶지만, 식민지 행성에서 탈출한 복제 인간을 찾아 처리해야 할 임무가 그에게 맡겨진다.
데커드는 레플리컨트 제조사인 타이럴 회사에 찾아갔다가 레이첼을 만난다. 회장은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라며 데커드를 시험한다. 그는 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실수로 인간을 죽인 적은 없나요?” 레이첼이 비수처럼 반문한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레플리컨트와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은 묻고 대답할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홍채 반응이다. 다른 때와 달리 판별이 어려웠지만 데커드는 레이첼이 복제 인간임을 알아낸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 제조가 목표인 회장은 레이첼을 내보낸 뒤 그녀가 아주 특별한 최신 제품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던 레이첼이 데커드를 찾아온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내보이며 자신은 틀림없는 인간이라고, 슬픈 얼굴로 주장한다. 조작이 가능한 사진이 과거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걸 레이첼도 알고 있다. 눈물이 레이첼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녀의 슬픔이 왜 데커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레이첼이 사라진다. 탈주자들을 쫓고 있는 데커드에게 그녀도 사냥해 오라는 명령이 추가된다. 하지만 레이첼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 묻는다. “나를 죽일 건가요?” 데커드는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가 아니어도 다른 사냥꾼이 그녀를 제거하러 올 것이다. 데커드는 그의 아파트에 레이첼을 숨긴다.
“당신도 복제 인간 테스트를 받아봤나요?” 레이첼이 쓸쓸하게 묻는다. 잠든 데커드는 답이 없다. 그는 레이첼의 말을 못 들었을까? 혹시 못 들은 척한 건 아닐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본질적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물음표가 또 있을까.
레플리컨트의 비극 또한 자기 뿌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갈망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부모 없이 공장에서 만들어졌다는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탯줄 없이 태어난 그들을 안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명은 본능적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무섭다. 무엇보다 이용당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슬픔을 분노로 바꿔놓는다.
레플리컨트가 탈출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탈주범들의 대장 로이는 자신들의 창조주인 타이럴 회장을 찾아가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4년이든 400년이든 주어진 시간보다 더 살고 싶은 게 생명이다. 그런 면에서는 로이 역시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사람이다. 방법이 없다는 회장의 말을 듣고 로이는 절망한다.
마침내 데커드와 로이가 마주 선다. 죽음이 예정된 로이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그는 데커드를 위기에 몰아넣고 말한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있는 기분이 어때? 그것이 바로 레플리컨트의 삶, 노예의 삶이야.”
매 순간 죽음을 의식하며 어떻게 살아갈수 있을까. 사람은 모두가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죽음을 잊고 산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을 희망하며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레플리컨트의 과거는 온통 거짓이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데커드는 레이첼을 떠올린다. 그녀의 두려움과 슬픔이 그의 가슴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는 달려간다. 레이첼을 지켜야 한다. 구할 수 없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어 줘야 한다. 그런데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1968년에 발표된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해서 1982년에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다. 원작과는 많이 다른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영화도 사랑과 희망의 빛을 끄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존재다. 행여 남과 너무 다르거나 누군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상처받는다. 나르시시스트처럼 자기 자신에게 터무니없이 만족하는 존재인 동시에 아버지를 죽이고어머니와 결혼해 자식 낳고 살았다는 걸 알고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 형벌을 내리고 파멸해 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무 일찍 결론을 낼 필요는 없다.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열심히 살아보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다. 다만 겸손한 고민은 필요하다. 앞으로 많은 일을 AI가 대신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무엇이 나은가. 우리는 완전한 존재인가. 우리는 이제 무엇이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