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마당에서 겨우 살아남은 오죽. /홍광훈
필자의 마당에서 겨우 살아남은 오죽. /홍광훈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시경(詩經)’ 중 ‘위풍(衛風)’의 첫 작품 ‘기오(淇奧)’는 모두(冒頭)에서 기수(淇水)가의 대나무를 묘사한 뒤 바로 군자를 언급한다. “저 기수가 굽은 곳에 푸른 대나무 무성하네. 멋있는 저 군자는, 옥돌을 자르는 듯 문지르는 듯, 쪼는 듯 가는 듯 열심이라오(瞻彼淇奧, 綠竹猗猗.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

이 때문인지 대나무는 예부터 흔히 군자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동진(東晉)의 명사 왕휘지(王徽之)가 한때 남의 빈집에 기거하면서 바로 대나무를 심었다. 어떤 이가 물었다. “잠시 사는데 뭘 그리 번거롭게 하오?” 그가 대나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하루라도 이 군자가 없어서야 되겠소(何可一日無此君)?” ‘세설신어(世說新語)’의 ‘임탄(任誕)’ 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당(唐) 중기의 유우석(劉禹錫)은 절구 ‘정죽(庭竹)’으로 이렇게 노래했다. “이슬이 분가루 묻은 마디 씻고, 바람은 푸른 옥 가지 흔든다. 무성한 모습 군자와 같아, 어울리지 않는 곳이 없다오(露滌鉛粉節, 風搖靑玉枝. 猗猗似君子, 無地不相宜).”

백거이(白居易)는 ‘양죽기(養竹記)’란 글에서 대나무는 뿌리가 굳고(本固) 성질이 바르며(性直), 속이 비어 있고(心空) 마디가 곧아서(節貞) 군자의 품격을 다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남송(南宋)의 왕염(王炎)은 ‘죽부(竹賦)’를 지어 “대나무의 기품은 군자와 닮은 데가 매우 많다(竹之操甚有似夫君子者)”면서 수양의 본보기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원(元)의 서화가 조맹부(趙孟頫)는 ‘수죽부(修竹賦)’에서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非草非木)’ 대나무가 “기품이 빼어나 세상 위에 있고, 자태가 시원스러워 세속을 벗어났다(操挺特以高世, 姿瀟灑以拔俗)”고 미화했다. 그리고 눈 쌓인 한겨울에 바람이 댓잎 스치는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면 “귀와 눈이 씻기고 마음이 즐거워진다(耳目爲之開滌, 神情以之怡悅)”고 감탄했다. 또한 “그 속을 비우고 마디를 실하게 하여 사철 내내 바뀌지 않는(虛其心, 實其節, 貫四時而不改)” 대나무에서 “군자의 덕을 본다(觀君子之德)”고 칭송했다. 이 문장은 그의 아내 관도승(管道昇)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위해 지은 것으로, 관도승이 이를 행초서(行草書)로 쓴 작품이 전해져 온다.

이에서 더 나아가 서진(西晉)의 강유(江逌)가 지은 ‘죽부(竹賦)’는 대나무가 “텅 빈 속을 품음으로써 도를 나타내고, 둥근 모습을 지님으로써 하늘을 본받는다(含虛中以象道, 體圓質以儀天)”고 철리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당 중기의 오균(吳筠)도 ‘죽부(竹賦)’에서 “도에 맞고 허에 부합되며, 곧음을 드러내고 절개를 보인다(契道合虛, 表貞示節)”고 나름대로 심오한 견해를 밝혔다. 북송 후기의 소식(蘇軾)은 대나무를 고아함의 상징처럼 말했다. ‘어잠승록균헌(於潛僧綠筠軒)’이란 시에서다. “먹을 때 고기가 없을지언정, 사는 곳에 대나무가 없을 수 없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마르게 하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속되게 한다. 사람은 말라도 살찔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 없다(寧可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尚可肥, 士俗不可醫).” 북송 말과 남송 초에 걸쳐 살았던 서정균(徐庭筠)은 ‘영죽(詠竹)’이란 율시에서 “흙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마디가 있고, 구름 향해 올라가도 마음은 비어(未出土時先有節, 便凌雲去也無心)”라고 묘사했다. 곧은 지조를 타고나 세속에서 출세해도 욕심 없는 고결한 지식인의 인품을 대나무의 성질에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온 대나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역대의 수많은 문인으로 하여금 대나무를 즐겨 묘사하도록 했다. 대나무의 군자적인 풍모와 함께 특히 추위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버티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 많은 이가 매료됐다. 

남북조시대 제(齊)의 왕검(王儉)은 ‘영구죽부(靈丘竹賦)’에서 “푸른 잎은 공중에 날리는 눈과 아름다움 다투고, 곧은 가지는 높이 쌓인 얼음과 고움 겨룬다(翠葉與飛雪爭采, 貞柯與增冰競鮮)”고 눈과 얼음 속에서 더욱 돋보이는 대나무의 자태를 경이롭게 지켜봤다.

북송 초의 왕우칭(王禹偁)은 율시 ‘관사죽(官舍竹)’에서 “요염한 꽃들 따라 봄 색깔 다투지 않고, 홀로 외로운 절개 지켜 한 해 저무는 추위 기다린다(不隨夭艷爭春色, 獨守孤貞待歲寒)”고 그 고고한 모습에 경도했다. 그 뒤의 왕안석(王安石)도 대나무를 읊은 율시에서 “일찍이 쑥과 명아주 속에서 함께 비와 이슬 맞았지만, 마침내 소나무와 잣나무를 따라 얼음과 서리 속에 와 있네(曾與蒿藜同雨露, 終隨松柏到冰霜)”라고 그 굳센 기질을 기렸다. 

명(明) 말기의 오응기(吳應箕)는 눈을 맞아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를 보고 ‘설죽부(雪竹賦)’를 지어 그 굳세고 곧은 성질을 전한(前漢)의 급암(汲黯)과 소무(蘇武)나 당의 위징(魏徵) 등 역사상 지조 있고 강직하기로 유명한 인물들에 비유하기도 했다.청(淸) 중기의 문인 화가 정섭(鄭燮)은 자신의 대나무 그림에 부친 여러 ‘제화죽(題畫竹)’ 절구의 한 작품에서 찬 가을바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나무의 의연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을바람 어젯밤 소상강 건너서, 돌에 부딪치고 숲을 뚫어 미친 듯이 불어댔다. 오직 대나무 가지만이 조금도 겁내지 않아, 꼿꼿이 천 차례나 맞서 싸울 판일세(秋風昨夜渡瀟湘, 觸石穿林慣作狂. 惟有竹枝渾不怕, 挺然相鬪一千場).” 또 다른 제화시 ‘죽석(竹石)’에서도 이와 같이 끈질긴 성질을 다음과 같이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푸른 산을 꽉 물고 놓지 않나니, 뿌리는 원래 깨어진 바위 속에 서 있다. 천 번 갈고 만 번 쳐도 단단하고 굳셀 터이니, 동서남북 어디서 바람이 불든지 말든지(咬定靑山不放鬆, 立根原在破岩中. 千磨萬擊還堅勁, 任爾東西南北風).”

대나무를 그린 화가로는 판교(板橋) 정섭이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역대로 대나무를 즐겨 그린 사람이 적지 않다. 백거이와 동시대의 소열(蕭悅)은 당대의 최고로 꼽혔다. 당 말기의 장언원(張彥遠)이 지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와 북송 말기에 나온 ‘선화화보(宣和畫譜)’에는 그가 대나무를 잘 그려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고 기록돼 있다. 고관대작들이 다투어 그의 그림을 구했으나 얻기 어려웠다. 어느 날 백거이가 뜻하지 않게 열다섯 줄기나 그려진 그의 대나무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 이에 보답하는 뜻에서 그는 ‘화죽가(畫竹歌)’라는 166자의 긴 시가를 지어 보냈다. 그 시작 부분이 다음과 같다. “식물 중에 대나무는 그리기 어려워, 예나 지금이나 그리지만 비슷한 것이 없더라. 소 화백의 붓놀림은 홀로 생동감 넘쳐나, 그림이 나온 이래로 오직 한 사람일세(植物之中竹難寫, 古今雖畫無似者. 蕭郞下筆獨逼眞, 丹靑以來唯一人).” 

북송 후기의 문동(文同)도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하다. 소식 역시 대나무를 잘 그렸지만 그보다 열아홉 살 많은 이 선배로부터 대나무 그림의 진수를 배웠다고 밝혔다.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畫篔簹谷偃竹記)’ 라는 문장에서 그는 문동의 가르침을 이렇게 적었다. “대나무를 그릴 때에는 반드시 먼저 가슴속에서 이루어진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 붓을 잡고 화폭을 응시하면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인다. 이때 급히 그 상을 따라 붓을 휘두른다. 토끼가 뛰자 매가 떨어져 내리듯이(如兎起鶻落) 조금이라도 놓으면 사라져 버린다.” 이어서 그는 마음속으로는 그 까닭을 이해하겠으나(心識其所以然) 손이 이를 따르지 못하니, 배우지 않은 잘못(不學之過)이라고 고백한다.

식물 중에서 대나무만큼 용도가 다양한 것도 드물다. 동양에서는 특히 죽간(竹簡)과 악기로서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죽간은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오랫동안 필기도구로 널리 사용됐다. 음악적으로는 ‘한서(漢書)’의 ‘율력지(律曆志)’에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으로 하여금 곤륜산(昆侖山)의 북쪽 해곡(嶰谷)에서 대나무를 채취해 와 악기를 만듦으로써 음악을 제정했다는 전설이 기록돼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거금을 들여 오죽(烏竹) 수십 그루를 마당 곳곳에 심었다. 그러나 첫해 겨울에 절반이 얼어 죽고 이듬해에 나머지도 다 죽었다. 그러다가 올봄부터 몇 군데에서 가느다란 가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굳세게 버틴다고 한 옛사람들의 말이 지리적인 한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