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기술의 대두로 IT 디바이스 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특히 스마트 안경을 비롯한 증강현실(AR) 기기가 생성 AI(Generative AI)라는 ‘킬러 앱’을 등에 업고 스마트폰을 대체하는 제품 카테고리를 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구글, 애플 등 미국 빅테크와 중화권 전자·IT 기업도 ‘AI 안경’을 개발하거나 시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토종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 사피엔반도체는 AR 기기에 탑재되는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LED)용 디스플레이 구동 칩(DDIC) 설계 업체다. 창업자인 이명희(62) 대표는 미국 조지아공대 전기공학 박사로,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DDIC 개발팀장, 현대자동차 차량용 반도체 센터장,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 등을 지낸 반도체 전문가다. 그는 2017년 사피엔반도체를 창업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재직 시절 마이크로 LED의 가능성을 보고,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 대표는 10월 21일 경기도 판교 사피엔반도체 본사에서 만나 “AI 기술 발전으로 AR 기기가 드디어 확실한 상품성을 갖게 됐다. 미국의 대표적인 빅테크가 모두 AI 안경을 개발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라며 “AI 안경은 색재현, 전력 효율, 빠른 반응속도 등을 위해 마이크로 LED 디스플레이 탑재가 필수적이고, 이 분야에서 사피엔반도체는 가장 독보적인 DDIC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DDIC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등에 비해 난도가 낮은 산업으로 알려졌다. 실제 삼성전자나 LG전자는 디스플레이용 칩을 수직 계열화해 자체적으로 수급하거나, 저렴한 중국과 대만산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판매하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나 액정표시장치(LCD) TV의 경우 디스플레이 칩 성능이 반드시 좋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크로 LED 디스플레이는 얘기가 다르다. AR 기기는 대낮에도 가시성을 확보해야 할 정도로 밝으면서 반응속도가 빠르고, 저전력, 초소형 구조의 DDIC가 필요하다. 이 대표는 “사피엔반도체는 메모리인픽셀(MIP)이라는 마이크로 LED에 특화한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등록했다”며 “이 기술은 DDIC에 메모리를 내장해 비트가 가진 정보를 통해 색을 구현하는 정보를 기억하며 빠르고, 더 밝으면서도 전력을 덜 소모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사피엔반도체는 미국의 빅테크 한 곳과 공동 개발 파트너십을 맺고, AI 안경에 맞는 DDIC 공급을 준비하고 있다. 파트너십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개소하기도 했으며, 고객사 요청에 따라 신속하고 빠른 칩 공급을 위해 파운드리 업체 역시 미국 현지 기업인 글로벌 파운드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대표는 “마이크로 LED는 생산공정이 디스플레이 산업보다 반도체와 유사하다”며 “디스플레이 산업이 패널 기반에서 웨이퍼 기반의 반도체 산업으로 바뀌게 되는 중요한 기로에 있는데, 이 커다란 패러다임 변화 속에 엄청난 기회가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피엔반도체를 창업하게 된 배경은.
“오랜 기간 디스플레이 산업을 지켜봤다. 브라운관부터 LCD, OLED 등 디스플레이 기술은 10년에서 15년 단위로 다음 세대로 넘어왔다. 지금은 마이크로 LED가 사실상 ‘종결형’ 디스플레이로 언급되고 있고, 많은 회사가 주목하고 있다. 특히 AR 같은 새로운 형태의 기기에서는 마이크로 LED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래서 마이크로 LED에 확신하게 됐다. 디스플레이는 진화하는데 대부분 디스플레이 구동 칩은 아직 아날로그 칩을 사용한다. LG디스플레이의 경우 과거 계열사를 통해 수직 계열화했고,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마이크로 LED가 대세이며, AR 기기에서 DDIC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봤다.”
기존 디스플레이 구동 칩과 마이크로 LED 구동 칩은 무엇이 다른가.
“LCD, OLED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구동된다. 사피엔반도체가 설계하는 칩을 디지털 기반으로 바꿨다. 아날로그 칩은 대기 전력이 필요하고, 소자가 크다 보니 초소형으로만들기 어렵다. 사피엔반도체는 모든 걸 디지털로 변경해서, 구동할 때 외엔 대기 전력을 최소화했고 칩 집적도도 상당히 높였다. 칩 면적 기준으로 보면 네 배 정도 차이 난다고 보면 된다.”
사피엔반도체만의 차별화된 기술이 있나.
“메모리인픽셀(MIP·Memory In Pixel) 기술이 가장 특별하다. DDIC를 통해 픽셀의 밝기, 색재현율 등의 정보를 기억하고 조정하는 기술이다. 비트에 저장된 정보를 토대로 더 효율적이며 빠르고 선명하게 화면을 제어하는 것이다. 픽셀을 개별 제어하는 회로에 기억 소자가 들어가 있어 이를 토대로 색을 제어할 수 있다. 반도체에 비유하자면 기존의 D램처럼 운용되던 DDIC를 S램(CPU 다이에 장착되는 캐시메모리로 작동 속도가 D램보다 월등히 빠름) 구조로 바꿨다고 보면 된다. 이미 전 세계에 이 기술 특허권을 확보해 놓았으며, 여기에서 파생되는 특허 또한 160건 이상 출원했고 그중 절반은 등록됐다. 일종의 특허 장벽을 쌓아가고 있다. 특허로 사업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60건의 특허 중 20건은 MIP 관련 특허다. 혹시라도 허점을 보고 경쟁사가 침범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다.”
AR 디스플레이의 경우 애플이나 메타 등 최종 고객사와 협업도 중요할 것 같다.
“최종 고객사와 직접 협력하고 있다. 이미 공시한 바 있듯이 실리콘밸리의 빅테크와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AR을 사용할 때 소비자가 느끼는 어지러움 같은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과 달리 AI 안경은 사용자 움직임을 포착한다. 수시로 움직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디스플레이 환경을 조정해야 한다. 많은 노하우가 필요하고, 시스템 회사와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미국 빅테크를 비롯해 현재 30여 개 기업에서 AI 안경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생 업체뿐만 아니라 기존 대형 전자 업체도 있다. 스마트 글라스를 오래 연구개발해 온 회사도 AI 열풍에 맞춰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합종연횡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2030년쯤에는 1억 개 이상의 AR 기기가 양산될 것으로 본다. 스마트폰 수준으로 물량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AI 안경을 가장 유망한 분야로 보는 이유는.
“스마트 글라스는 착용감과 이렇다 할 효용이 없어 산업이 정체돼 있었다. 생성 AI 붐이 일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무겁고, 특별한 이점이 없었던 스마트 글라스에 AI라는 킬러 앱이 생기면서 실시간으로 사람과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준다.
스마트폰으로 가능한 새로운 혁신은 이제 없다. AI 안경이 스마트폰에 이어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방식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게 될 것이다. 착용감도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스마트 글라스는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안경 형태다. 이것이 진짜 현실에 와닿는 AI 혁명을 이끌 것으로 본다.”
마이크로 LED 시장이 커진다면 디스플레이 시장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기존에 LCD, OLED는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등 패널 장치 기업이 이끌었다. 마이크로 LED는 LED 칩을 소자로 사용하기 때문에 산업의 본질이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반도체 산업으로 바뀐다. 사피엔반도체가 설계하는 백플레인도 웨이퍼 기반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처럼 수직 구조로 쌓아 만든다. 패러다임이 바뀐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반도체 산업이 되는 것이다. 이 커다란 패러다임 변경에는 엄청난 기회가 있다. 이 기회를 일찍 포착했고, 아직 이렇다 할 경쟁사가 없다. 독립 회사로 사피엔반도체를 키워 국내에 흔치 않은 글로벌 팹리스 업체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