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 현대차그룹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 현대차그룹

현대자동차(현대차)그룹이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한 것이다. 국내 주요 기업 중 최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전문 경영인 부회장도 부활했다. 도널드 트럼프 1기 정부에서 주인도네시아 대사 등을 역임한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은 사장으로 영입됐다. 

현대차그룹은 11월 15일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을 현대차그룹 부회장으로 승진 임명하고, 호세 무뇨스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미주대권역장을 현대차 대표이사에 내년 1월 1일부로 선임하는 내용 등을 담은 ‘2024년 대표이사·사장단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이번 인사는 정의선 리더십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직에 혁신 바람을 일으킨 파격적인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현대차그룹은 순혈주의 기조를 강조했는데, 정 회장 체제가 시작된 2020년 이후에는 외국인과 비(非)현대차 등 출신에 구애받지 않는 인사 경향을 보인다. 이는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외부 인재 영입이 가장 빠르다는 정 회장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내부에 건강한 긴장감을 만드는 데도 효과적이다. 

장재훈 부회장, 호세 무뇨스 CEO, 성 김 사장 등 주요 경영진은 현대차 공채 출신이 아닌 외부에서 왔다. 지연, 학연을 고려하지 않고 과녁에 꽂힌 점수로만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대한양궁협회(양궁협회)의 무파벌, 공정 인사 원칙과 맥이 통한다. 정 회장은 2005년부터 19년째 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3년 만의 전문 경영 부회장…현대차의 히딩크

장재훈 부회장은 2021년 말 윤여철 부회장이 물러난 지 3년 만에 부활한 전문 경영인 부회장이다. 2010년대 초 14명에 달한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지난 3년간 오너 일가인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을 제외하면 전문 경영인 중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장 부회장은 일본 닛산과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근무한 이력 덕분에 국제 감각이 탁월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2011년 현대글로비스를 거쳐 2012년 현대차에 합류하고, 국내사업본부장, 제네시스사업본부장을 역임한 뒤 2020년 말 현대차 CEO에 올랐다. 제네시스 브랜드를 국내외 프리미엄 시장에 안착시키고, 현대차·기아의 글로벌 톱3 등극을 이끌며 현대차 경쟁력 강화의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최근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현대차 인도법인 상장도 진두지휘했다. 

장 부회장은 2019년 초 경영지원본부장 때부터 ‘검은 양복·넥타이’로 대표되는 고루한 복장 규정을 없애고, 자율 좌석제, 재택근무 확산 등으로 현대차 조직 문화 혁신을 주도했다. 외부 출신으로 현대차 시스템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현대차의 히딩크’로도 불린다. 장 부회장은 향후 현대차그룹 완성차 담당 부회장으로 상품 기획과 가치 사슬 전반을 담당한다. 여기에 연구개발(R&D)과 계열사까지 모두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첫 외국인 CEO·美 외교관 출신 사장…트럼프 2.0 대비

1967년 현대차 설립 이후 57년 만의 첫 외국인 CEO 선임은 판매에서 해외 비중이 80%를 넘고, 해외 판매의 미국 비중이 20%를 넘는 현대차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2014년 1~10월 현대차 전체 판매량 약 344만7000대 가운데 해외는 약 286만6000대, 그중 미국 판매량은 약 74만 대다. 

트럼프 2기 출범은 경영 불확실성을 키운다. 트럼프 당선인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폐지, 모든 수입품에 대한 10~20% 보편 관세 부과 등 이전 조 바이든 행정부와는 다른 무역·통상 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2021년 이후 메타플랜트(HMGMA)와 전기차 배터리 공장 두 곳을 포함, 미국에 158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한 현대차는 트럼프 재집권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런 가운데 정 회장은 선제적인 파격 인사로 시장 승기를 잡기 위한 승부를 걸었다.

성 김 전 대사의 사장 영입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불어닥친 트럼프발(發) 폭풍을 고려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김 사장은 조지 W. 부시 행정부부터 버락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정부에서 외교 관련 핵심 요직을 맡았다. 친(親)정부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10대 시절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대사를 역임했다. 미 국무부에서 대북정책특별대표로 활동한 최고위급 외교관 출신이다. 트럼프 1기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대사를 지냈고, 미국 외교관으로는 최고위직인 경력 대사 칭호도 받았다. 2018년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미국 측 실무회담 대표단을 이끌었다. 

김 사장은 2024년 초 고문역으로 현대차에 합류했고, 이어 사장으로 전면적인 경영 참여를 하게 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와 현대차의 교류와 협력에 큰 역할이 기대된다. 김 사장은 글로벌 대외 협력, 국내외 정책 동향 분석 및 연구, 홍보 등을 총괄한다. 

Plus Point

정의선의 남자 호세 무뇨스, 북미 판매 증대의 선봉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 /사진 현대차그룹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 /사진 현대차그룹

호세 무뇨스 사장은 스페인 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스페인 IE(Instituto de Empresa) 비즈니스스쿨 경영대학원(MBA)을 거쳐 마드리드 폴리테크닉대에서 원자핵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프랑스 PSA(푸조·시트로엥)의 스페인 딜러(판매사)로 자동차 경력을 시작했고, 1996년에는 대우자동차 이베리아 법인에서 딜러네트워크 팀장으로 일했다. 1999년 도요타 유럽 법인에서 스페인·포르투갈 판매 마케팅 담당으로 재직하다 2004년 닛산 유럽 법인 판매·마케팅 담당, 멕시코 법인장을 시작으로, 북미 법인장, 전사성과담당(CPO) 겸 중국 법인장 등 15년간 일했다. 현대차에는 2019년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GCOO) 및 미주 권역 담당으로 합류했다. 

이 당시 현대차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사태와 중국 토종 업체 약진 속에서 중국 시장 입지가 줄어들면서 판매 위기를 맞았는데, 무뇨스 사장이 총괄한 북미 시장이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현대차를 받쳤다. 이런 북미 판매 증진에 힘입어 현대차·기아는 도요타와 폴크스바겐에 이어 글로벌 판매 3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무뇨스 사장 합류 전인 2018년 67만7946대였던 현대차의 미국 판매는 5년 만인 지난해 84만370대로 28.4% 증가했다.

박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