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 순매도가 쌓이면서 11월 14일 4만9900원까지 떨어지며 ‘4만전자’ 소리를 들었던 삼성전자 주가는 하루 뒤인 11월 15일 5만3500원으로 반등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장 마감 후 주주 가치 환원을 위해 향후 1년간 자사주 10조원을 매입하고, 이 중 3조원을 3개월 내 매입 후 소각하겠다고 공시했다. 이 영향으로 11월 18일 삼성전자 주가는 전거래일 대비 5.98% 오른 5만6700원에 거래를 마쳤다. 그러나 삼성전자 주가는 11월 19일엔 5만6300원에 거래되며 전일 대비 0.71% 하락했고, 11월 20일에도 1.78% 하락한 5만530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11월 21일 5만6400원으로 사흘 만에 반등했지만, 자사주 매입 발표 효과로 ‘6만전자’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주가가 5만원대에 갇힐 가능성도 제기된다.
# 고대역폭 메모리(HBM) 사업 부진 등으로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이 SK하이닉스에 추월당하면서 ‘삼성전자 위기론’이 부각된 가운데. 11월 19일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의 37주기 추도식이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서 진행됐다. 이날 추도식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등 유족만 참석하는 등 간소하게 치러졌다. 애초 재계에서는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이재용 회장이 위기 극복을 위한 혁신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지만, 예년처럼 조용한 추도식이 진행됐다.
11월 15일 발표한 10조원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은 2015년(11조4000억원) 이후 삼성전자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삼성전자가 9조3000억원 자사주 매입 후 절반을 소각한 2017년 이후 7년 만에 ‘주주 가치 제고안’ 을 꺼낸 것은 추가적인 주가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반도체 경쟁력 저하 우려가 불거진 후 삼성전자 주가는 단기 고점이었던 8만300원(8월 16일) 대비 최대 40% 떨어졌다. 게다가 지난 7월 이후 삼성전자 주식을 18조원 순매도한 외국인의 투자 동향은 외환시장에서 원· 달러 환율을 1400원까지 끌어올렸다(원화 가치 하락)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주가 하락을 막는 게 국내 금융시장 안정에 중요한 과제가 된 셈이다.
시장은 이재용 ‘혁신 메시지’ 기다리는데…
삼성전자가 7년 만에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 카드를 꺼냈음에도, 시장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이유는, 경쟁력 강화 구상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다. 특히 11월 19일 호암 이병철 창업 회장 37주기 추도식에서 이재용 회장이 아무런 메시지를 내지 않은 것을 실망스럽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이건희 선대 회장 등 삼성 총수는 사업 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강한 혁신 메시지를 내놨는데,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 위기론에 침묵하고 있다” 면서 “리더십에 대한 실망감이 지지부진한 주가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의 1993년 프랑크푸르트 ‘신(新)경영’ 선언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고 지적한다. 김형준(서울대 명예교수)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 단장은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 이재용 회장이 직접 새로운 비전과 조직 혁신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기술 재도약을 위해 기흥 캠퍼스에 건설 중인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뉴리서치&디벨롭먼트(NRD-K)’ 설비 반입식(11월 18일)에도 이재용 회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3兆 자사주 소각 계획에 “실망” 반응
삼성전자가 자사주 소각 규모를 3조원으로 제시한 점도 주가 흐름을 둔탁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회사 측이 매입한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면 주식 발행 총수 감소로 인한 주가 상승효과가 분명하다. 반면, 주식 소각 없이 회사 측 보유 상태로 놔두면 지배주주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11월 17일 발표한 논평에서 “80% 이상 외국인 투자자는 회사 현금으로 자사주를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각이 없는 경우 주주 가치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배경이다. 이 때문에 ‘주주 가치 제고’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식 소각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당장 소각 예정 3조원은 시총의 1% 수준으로, 최근 수년간 주주의 대규모 투자 손실 감안 시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현대차, SK, LG전자와 달리 삼성전자가 밸류업(중장기 주주 가치 제고) 방안을 발표하지 않은 것도 비판받는 지점이다.
투자자 사이에서는 이르면 11월 말 단행될 삼성전자 사장단 및 임원 인사, 조직 개편을 통해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을 확인하겠다는 기류가 강하다. 업계에서는 DS 부문 사업부장 대거 교체설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쟁력 회복 △책임 경영 확립 △관료주의적 경영 문화 해소 등을 위한 거버넌스 개혁 조치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남우 회장은 “위기론이 불거진 후 삼성전자가 보여주는 대응은 시장의 눈높이와 거리가 있다”면서 “내년 3월 주주총회가 어려워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순혈주의’ 깨는 혁신 가능할까…“유학파 박사 입지 TSMC보다 좁아”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
삼성전자 DS 부문장인 전영현 부회장은 10월 8일 3분기 잠정 실적 발표 후 이 같은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DS 부문의 영업이익(3조8000억원)이 SK하이닉스(7조300억원)의 절반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그친 실적 부진이 메모리 분야 기술 경쟁력 저하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르면 오는 11월 말 단행될 사장단 및 임원 인사에서 기술 경쟁력 회복을 위한 파격적인 발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재용 회장이 스타급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를 외부에서 수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런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순혈주의 색채가 강한 삼성전자 내부 인력으로는 위기 돌파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서울대보다 많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삼성전자 고위직 엔지니어 중 해외 유학파 비중은 대만 TSMC 등 경쟁 업체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8명의 TSMC 부사장 이상 임원 중 17명이 박사 학위 소지자이며, 이 중 14명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고위급 임원 절반이 유학파 박사로 채워진 셈이다. 최고경영자(CEO)인 웨이저자 회장은 예일대, 라웨이런 시니어 부사장은 UC 버클리, 미위지에 수석 부사장 겸 COO(최고운영책임자)는 UCLA 박사 출신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14명의 엔지니어 출신 사장급 이상 임원 중 미국 박사 학위 소지자는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오하이오 주립대), 전경훈 DX 부문 CTO(최고기술책임자·미시간대) 두 명뿐이다. 반도체 사업을 책임지는 전영현 부회장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은 서울대 박사 출신이다. 삼성전자 DS 부문의 부사장급 팀·실장 20여 명으로 넓혀봐도 미국 등 해외 대학 박사 출신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TSMC와 비교하면 유학파 출신의 입지가 넓지 않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스탠퍼드대 박사인 모리스 창 창업자의 영향력이 강한 TSMC는 유학파 박사를 스카우트해 핵심 인력으로 중용한 반면, 삼성전자는 국내 대학에서 석사과정 때부터 산학연 프로그램에 참여해 사실상 ‘삼성 사람’인 엔지니어가 중용되는 분위기였다”면서 “외부에 폐쇄적인 순혈주의가 기술 경쟁력 약화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