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기업 TSMC와 2위 삼성전자(이하 삼성)의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4년 2분기 두 기업의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격차는 50.8%포인트로, 2020년 2분기(32.7% 포인트) 때보다 더 벌어졌다. 문제는 막대한 정부 지원과거대한 내수 시장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까지 빠르게 파운드리 시장에 진입 중이란 사실이다. 한때 순위권 밖이었던 중국 파운드리 기업 SMIC가 올해부터 3위 자리에 안착하며 삼성 턱밑까지 쫓아온 게 대표적이다.
올해 11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TSMC, 세계 1위의 비밀’ 저자인 린훙원(林宏文)은 최근 인터뷰에서 “삼성도 선단(초미세) 공정으로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현재 대만 경제 주간지 ‘금주간(今周刊)’ 고문으로 30년간 TSMC를 밀착 취재해 온 반도체 전문 저널리스트다. 그가 봤을 때, 삼성도 이제는 중국에 의해 ‘레드 오션’이 되고 있는 레거시(구형) 공정 비중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차별성’과 ‘비대체성’이 관건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강조했던 ‘초격차’와 맥을 같이한다.
린 고문은 현지에선 ‘TSMC 전문가’로 통하지만, 과거 ‘상업대악(商業大鱷·시장의 거물) 삼성’을 집필하는 등 한국 반도체 시장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그에게 TSMC가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과 함께 삼성 위기의 원인과 활로에 관해 물었다.
TSMC의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제패 비결은.
“가장 중요한 요인은 파운드리에 집중한 TSMC의 독보적인 사업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TSMC는 1987년 설립 첫날부터 파운드리 사업에만 집중했다. 자체 제품은 안 만들었다. 지난 40년간 세계 반도체 산업이 수직 통합에서 수직 분업으로 바뀌는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TSMC가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여기에 고객 중심의 서비스 정신까지 더해져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처음부터 TSMC가 세계 1위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나.
“예상하지 못했다. TSMC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시험대에 올라야 했다. 2000년 이전에는 대만 2위 파운드리 UMC의 맹추격을 받았고, 2014년쯤엔 삼성이 애플 물량을 가져가며 TSMC를 압박했다. 하지만 TSMC는 물러서지 않았다. 2002년 0.13㎛(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공정 기술 개발에 성공하며 UMC를 따돌렸고, 야간 교대 조로 이뤄진 일명 ‘나이트호크 부대(夜鷹部隊)’를 투입한 끝에 애플 물량을 삼성으로부터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선 TSMC 같은 기업이 왜 탄생하지 못할까.
“한국, 일본, 중국의 경우 반도체 산업이 구조적으로 대만과 다르다. 브랜드, 기술, 제조, 부품 등 모든 단계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산업구조가 전반적으로 수직 통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기업과 직접적인 경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만도 과거 D램과 디스플레이 등 표준 제품 시장에 도전했으나, 한국과 중국에 밀려 실패했다. 대신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차별화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에 집중했고, 미국 기업의 요구를 빠르게 충족했다. 덕분에 TSMC를 비롯한 대만 기업이 반도체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TSMC 부사장 이상 임원 28명 중 17명이 박사, 이 중 14명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해외파 박사급 임직원이 TSMC 성장을 이끈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나.
“TSMC의 높은 해외 박사 비율은 여러 경쟁력 중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많은 TSMC 고위 임원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다국적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은 미국 고객사에 대한 이해와 요구 충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들과 긴밀한 관계 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지금도 고객사 60% 이상이 미국 기업이다.”
앞으로 TSMC의 독주는 계속될까.
“선단 공정의 경우 TSMC가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어 앞으로도 선두를 유지할 전망이다. 반면 레거시 공정은 중국 참전으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삼성이나 인텔이 빠르게 선단 공정 영역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두 기업은 시장점유율을 더 잃을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중국 반도체 산업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중국 반도체 산업은 시장점유율을 위해 수익성을 포기하고, 손실을 감수하며 생산량을 늘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기존 시장구조를 뒤흔들 수 있는 접근법이다. 물론 미국이 중국에 선단 공정 기술과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아 둬, 중국이 기술적으로 이 시장에 진입하긴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레거시 부문이다. 중국은 전력을 다할 것이다. 대만은 중국이 관여한 산업이 ‘레드 오션’으로 변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차별화된 산업과 기술적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분야에 집중한 이유다. 한국에도 필요한 교훈이다.”
오랜 시간 삼성을 지켜본 입장에서 최근 불거진 ‘삼성 위기론’의 원인을 짚어본다면.
“첫째, 중국의 부상이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메모리 등에서 삼성이 중국 기업과 경쟁하게 됐다. 둘째, 인공지능(AI)의 빠른 발전으로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TSMC는 첨단 패키징 기술 ‘CoWoS’를 통해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와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배제됐다. 셋째, 2019년 일제강점기 징용공 배상 문제로 일본이 한국에 일부 화학물질 수출을 금지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삼성의 생산 수율(양품 비율)이 영향받았고, 이후 공정에서도 뒤처지게 됐다. 넷째, 2020년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이재용 회장이 경영을 맡았다. 문제는 이 시기가 미·중 기술 전쟁, 코로나19, 공급망 단절 등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점이다. 이때 이재용 회장이 스캔들과 소송에 휘말리면서 주요 경영 결정이 지연됐고, 전체 전략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삼성에 필요한 것은.
“모든 기업에 가장 귀중한 자원은 최고경영자(CEO)의 시간이다. 삼성은 여러 제품 라인을 운영하며 대부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 분업 시대에선 이런 방대한 사업 전개가 CEO의 시간 자원을 지나치게 분산시킨다. 이에 의사 결정이 느려지고 경영은 더 어려워진다. 특히 삼성 같은 대기업은 각각의 사업 부문이 서로 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면 내부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럼 조직은 최소한의 합의점에 타협해야 하고, 각 사업 부문 경쟁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해야 한다. 삼성 조직 내부에서 어떻게 변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삼성 경영진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삼성이 TSMC로부터 배울 점은.
“고객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과 고객과 상생 철학 그리고 모든 직원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문화를 참고할 만하다. 고객의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이 지금 삼성에 가장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