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인 6명 중 1명은 주삿바늘이 싫어 예방 접종을 거르고, 인슐린 같은 주사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복용량을 지키지 못한다고 알려졌다. 이런 사람을 위해 획기적인 기술이 나왔다. 오징어나 갑오징어가 추진력을얻는 원리를 이용해 주삿바늘 없이 간단하게 약물을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 비만 치료제나 백신은 분자가 커서 주사로만 투여했는데 이번에 먹는 캡슐에 넣어 간단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조반니 트라베르소(Giovanni Traverso)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진은 11월 21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오징어가 물을 뿜어 추진력을 얻고, 먹물을 뿜어 천적의 눈을 가리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위장관 내벽에 직접 당뇨·비만 치료제 같은 약물을 전달하는 캡슐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주사제 불편 해소해 치료 효과 높여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이나 메신저리보핵산(mRNA) 방식의 코로나19 백신은 모두 분자가 커서 주사로만 투여할 수 있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가 개발한 비만 치료제 위고비나, 질병을 일으키는 항원에만 결합하는 단클론 항체 치료제도 마찬가지다.
분자가 큰 약물은 피부에 주사하지만, 일부는 인체 내부 특정 기관에 직접 주사해야 하므로 내시경 바늘이나 최근에 개발된 식용 로봇 바늘 장치가 필요하다. 모두 환자에게 불편해 투여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
트라베르소 교수는 노보 노디스크 연구진과 함께 오징어, 갑오징어 같은 두족류에게서 볼 수 있는 물·먹물 분사 작용을 모방한 마이크로제트(microjet·미세 분사) 전달 시스템을 개발했다. 연구진은 돼지 실험에서 고압 액체 분사 방식으로 비만 치료제 위고비 같은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유사체와 유전자를 제어하는 짧은 간섭 RNA (siRNA)를 위장 조직에 직접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전달 방향도 내시경이나 캡슐이 이동하는 수직 방향 또는 좌우 방향 모두 가능했다. 오징어는 머리를 둘러싼 외투막 안으로 물을 빨아들였다가 나중에 압축해 물을 분사한다. 분출 방향도 조절할 수 있다. 오징어는 이 힘으로 하늘도 날 수 있다. 2013년 일본 홋카이도대 연구진은 오징어가 고압의 물을 분사해 바다에서 뛰어올라 지느러미를 펴서 초당 최대 11.2m의 속도로 활공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인체 호르몬을 모방한 위고비나 mRNA 백신은 소화관에서 쉽게 분해된다. 먹는 약으로 만들기 어렵다는 말이다. 연구진은 이런 약물을 알약 같은 캡슐에 넣고 소화기관 내벽으로 분출하면 안전하게 안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번에 동물의 혈중 약물 농도가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했을 때와 같은 수준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오징어 방식의 약물 방출로 인한 조직 손상은 발견하지 못했다.
거북에서 영감받은 캡슐 모양
연구진은 앞서 약물을 전달하는 캡슐을 개발했다. MIT 연구진은 2019년에 이번 약물 전달 기술의 기반이 된 캡슐을 발표했다. 당시 캡슐은 미세 바늘을 이용했다. 트라베르소 교수는 MIT 화학공학과 로버트 랭어 교수와 함께 ‘사이언스’에 알약처럼 입으로 삼키면 위장에서 인슐린을 주입할 수 있는 ‘먹는 주사제’를 개발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개발한 먹는 인슐린 주사제는 콩알만 한 크기다. 윗부분은 도토리처럼 뾰족하고 아래는 납작해 전체적으로 종 모양이다. 안에는 인슐린과 주삿바늘이 들어 있다. 캡슐에는 이런 주사제 여러 개가 들어간다. 당뇨병 환자가 캡슐을 복용하면 위까지 전달된다. 캡슐은 위산에 녹아 사라지고 주사제가 밖으로 나와 위벽에 달라붙는다. 최종적으로 스프링의 힘으로 주삿바늘이 위벽에 박혀 인슐린을 주사한다.
연구진은 위벽은 통증을 감지할 수 없어, 주삿바늘로 인해 아플 일은 없다고 했다. 당시 캡슐은 돼지 실험에서 성인 당뇨병 환자가 한 번에 복용하는 5㎎ 용량의 인슐린을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인슐린 주입 후 주사제는 대부분 몸 안에서 녹아 사라지고 일부 녹지 않는 부품은 배설물과 함께 몸 밖으로 배출됐다. 부작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뇨 환자에게 알약처럼 먹는 인슐린은 꿈같은 이야기다. 그동안 통증이 크게 줄어든 주사제나 패치도 개발됐지만, 알약만큼 편리하지는 않았다. 연구진은 주사제를 알약처럼 만드는 아이디어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자연의 지혜도 주사제의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줬다. 연구진은 주사제의 외형을 뒤집혀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 거북 등껍질처럼 만들었다. 덕분에 주사제가 소화기관 안에서 굴러가다가도 마지막에는 늘 바닥이 위벽을 향해 주삿바늘이 제대로 들어간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당시 캡슐 연구 역시 인슐린 생산 1위 기업인 노보 노디스크가 참여해 상용화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구진은 이번에 오징어의 액체 분출 원리를 이용해 캡슐에서 바늘을 없앴다. 통증이 없다 해도 주삿바늘을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을 고려한 것이다. 처음 개발한 캡슐은 구르다가 늘 넓은 바닥이 소화기 벽 방향에 닿도록 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면 바늘로 약물을 전달하기 힘들다. 오징어는 다르다. 물을 분사하는 방향을 상황에 맞게 바꿀 수 있다. 연구진은 이를 모방해 원하는 방향에 닿지 않아도 수직이나 수평으로 약물을 분사할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