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겔싱어 전 인텔 CEO. /사진 인텔
팻 겔싱어 전 인텔 CEO. /사진 인텔

“인텔은 기술의 미래를 계속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2021년 1월 14일(이하 현지시각) 당시 실적 하락으로 위기를 맞은 인텔의 ‘구원투수’ 로 선임된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겔싱어는 취임 직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사업 재진출을 선언, ‘인텔의 제2 전성기’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인텔은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적도 하락했다. 결국 겔싱어 CEO는 선임 3년 10개월여가 지난 2024년 12월 1일 사임했다. 

겔싱어는 인텔 전성기에 최고기술담당임원(CTO)을 지낸 엔지니어 출신으로, 이후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인텔 CEO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모바일과 AI라는 신메가트렌드 속 첨단 반도체 기술에서 경쟁력을 잃은 인텔을 반전시킬 적임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텔의 몰락을 막지 못한 그는 45년 반도체 인생의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됐다. 겔싱어는 성명을 통해 “달곰씁쓸했다(bittersweet)”라고 했다. 이어 “현재 시장에 인텔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결정을 힘들지만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었던 해였다”고 했다. 

로이터통신은 겔싱어 사임 직후 소식통을 인용해 “진척이 없는 성과에 좌절한 이사회가 ‘해임이냐 사임이냐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겔싱어는 사임을 선택했다”고 보도했다. 인텔의 경영은 겔싱어의 후임을 찾을 때까지 데이비드 진스너 최고재무책임자(CFO)와 미셸 존스턴 홀트하우스 클라이언트컴퓨팅그룹(CCG) 사장이 맡는다. 인텔은 겔싱어의 퇴임을 ‘은퇴’라고 표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인텔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56년 역사의 인텔이 몰락해 가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겔싱어, 반전은 없었다

인텔은 미국을 대표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이다. IDM은 반도체 기획, 설계, 생산 등을 모두 아우르는 반도체 사업 한 형태로, 삼성전자와도 유사하다. 인텔은 PC(퍼스널 컴퓨터)의 두뇌가 되는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수십 년간 지켜왔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PC 시대가 점차 저물고,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모바일과 클라우드 컴퓨터, AI 시대가 급격히 찾아오며 흐름을 잡지 못했다. 겔싱어는 인텔 역시 TSMC나 삼성전자처럼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초미세 공정을 중심으로 하는 파운드리 시장은 이미 TSMC가 독주 체제를 확립한 상태였다. 시장 2위 삼성전자도 인텔은 넘지 못했다. 

겔싱어는 IDM의 단점으로 꼽히는 방향 전환, 외부 기업과 협업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IDM 2.0을 선언하고, 파격 행보를 이었다. 인텔 사상 처음으로 주력 CPU 생산을 외부 파운드리인 TSMC에 맡겼고, 설계와 파운드리를 분리해 전문성을 강화하려고 했다. 초미세 공정 역시 인텔 7(7㎚급 반도체·1㎚는 10억분의 1m), 인텔 4(4㎚급 반도체), 인텔 3(3㎚급 반도체), 인텔 20A(2㎚급 반도체), 인텔 18A(1.8㎚급 반도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 우선’을 외치며 공정 혁신을 내세워봤자, 해당 시장에서 인텔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파운드리·AI 현실의 벽 높았다

겔싱어의 계획과 의도는 충분히 통하지 않았고, 회사 내부에선 불만이 터져 나왔다. CEO가 제품보다 새 공장(파운드리)을 짓는 데만 몰두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2024년 8월 인텔 이사회 핵심 멤버 립부 탄 이사가 겔싱어 CEO의 경영 방침에 이견을 보이며,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탄 이사는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을 위해 영입한 업계 베테랑이었다. 

겔싱어가 CEO로 취임한 2021년부터 인텔은 파운드리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미국 오하이오 18A 공장에 200억달러(약 28조원)를 투입한 것을 시작으로 파운드리 분야에만 총 250억달러(약 35조원)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인텔 파운드리 사업은 2023년 90억달러(약 12조5901억원) 적자를 냈고, 2024년 상반기에도 53억달러(약 7조4142억원) 손실을 봤다. 

겔싱어가 제시한 목표는 실현이 좌절되는 일이 잦았다. 그는 2024년 2월 인텔 자체 행사에서 2030년까지 파운드리 시장 2위를 차지하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으나, 정작 삼성전자에도 경쟁력이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목표 발표 당시 겔싱어가 자신했던 1㎚대 공정(18A·1.8㎚) 반도체는 TSMC도 이뤄내지 못한 첨단 초미세 공정 기술로, 인텔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MS)를 1㎚ 반도체의 고객사로 확보했다는 홍보를 하기도 했다. 

잃어버린 리더십, 시장은 냉정했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와 고객사는 인텔의 기술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TSMC 또한 2㎚대 반도체의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양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30%대로 낮은데, 인텔의 18A 수율은 10%도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30년부터 연간 150억달러(약 20조9835억원)의 매출을 외부 고객으로부터 유치하겠다는 겔싱어의 공언(公言)은 공언(空言)이었던 셈이다. 

엔비디아를 추월하겠다며 출시한 AI 반도체 ‘가우디’도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겔싱어는 2024년 10월 3분기 인텔 실적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가우디의 활용이 예상보다 더디고, 올해 판매 목표로 삼았던 5억달러 매출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적 부진으로 인텔 주가는 2024년 들어 52% 하락했다. 겔싱어 사임으로 주가가 한때 상승하기도 했지만, 인텔의 주가는 12월 3일 기준 전 거래일 대비 6.1% 하락한 주당 22.47달러로 내려앉았다. 

경영 실패로 인한 인텔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인텔은 2024년 직원의 15%인 약 1만5000명을 해고했고, 2024년 4분기 배당금 지급을 중단했다. 2025년에는 100억달러(약 13조9890억원)에 달하는 비용 절감을 예고했다. 반도체 설계 기업 퀄컴의 인수합병(M&A) 매물로 거론되는 굴욕도 맛봤다. 

인텔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표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한다는 시장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결국 2024년 11월 2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에서 25년 만에 퇴출당했고, 그 자리는 AI 반도체를 선도하는 엔비디아가 대신했다. 

박진우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