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2025년의 세계 안보 지형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변화는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됐다. 3년 차를 맞이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같은 교착상태에서 교전 당사국은 물론이고 지원국까지 지치게 했다. 그러나 8월 돌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로 진격하면서 전황이 바뀌었다.
양대 전쟁과 트럼프 당선
언제든 핵 사용이 가능하다고 위협해 적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핵 그림자 전략’ 이라고 한다. 핵 그림자로 우크라이나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묶어놨던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의 진격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러시아는 우선 핵 교리를 변경했다.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핵 비보유국과 그 지원국에 대해 핵 공격이 가능하다면서 핵 사용 문턱을 낮췄다. 또한 미국과 NATO 공격 무기의 러시아 본토 사용에 대응해 ‘오레시니크’ 극초음속 미사일 공격으로 언제든 핵 공격이 가능함을 경고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핵 그림자 전략보다 훨씬 더 위험한 선택을 했다. 바로 북한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참전시킨 것이다. 여태까지 러시아가 연방국의 전력을 사용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완전히 제삼국을 불러들인 것은 처음이다. 세계는 북한 참전으로 전쟁이 더욱 확전될 것을 우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일파만파로 확장돼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 경로를 향하고 있었다. 4월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이 공습으로 보복했으며, 10월에 2차 충돌이 있었다. 약속 대련 같았던 1차 공방은 큰 피해 없이 경고에 그쳤지만, 2차 공방은 다소 과열됐다. 특히 이스라엘은 일련의 정밀 타격으로 이란 방공망을 완전히 무력화하며 더 이상 경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친이란 무장 단체 지휘부를 완전히 제거한 후 헤즈볼라에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하면서 11월 말 헤즈볼라와 휴전했지만, 하마스와 휴전은 요원하다.
하지만 2024년의 가장 큰 안보적 변화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가장 난처한 상황을 맞은 것은 유럽이다. NATO 회원국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지원하면서 ‘국내총생산(GDP) 2% 국방비 사용’이라는 조건을 충족했지만, 트럼프는 이것도 부족하다고 이제 두 배를 더 올릴 것을 요구한다. 더욱 중요하게는 유럽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떠맡고 신속히 끝내기를 바란다. 미국이 여전히 우월적 권위는 갖지만, 상대적으로 책임은 덜 지는 안보 형태를 트럼프가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종결과 유럽 안보의 유럽화
당장의 관심은 양대 전쟁이 언제 끝날지다. 트럼프는 두 개의 전쟁을 끝내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두고 트럼프는 ‘취임 24시간 이내에 종전시키겠다’는 등 매우 강력한 발언을 내세웠다. 다소 과장된 어투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트럼프의 특성상, 실제로 취임 후 24시간 이내에 전쟁을 멈추지는 못하겠지만, 매우 이른 시일 안에 전쟁을 종결시키고자 할 것만큼은 명백하다.
트럼프가 어떻게 정전·종전을 끌어낼 것인지는 아직 명백하지 않지만, 우크라이나· 러시아 특사로 임명한 키스 켈로그 예비역 육군 중장을 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켈로그는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의 한 연구문에서 미국의 핵심 이익이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는 없다고 평가했다. 오히려 러시아가 핵전쟁으로 확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미국의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협상 방안은 여태껏 제시된 어느 방안보다도 구체적이다. 우크라이나에 전쟁 지원 중단, 러시아에 지원 강화를 각각 카드로 내세워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당기며, 러시아엔 최소한 20년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연기를, 우크라이나엔 재건 비용 마련과 대대적 무기 지원을 통한 안전 보장을 제시했다. 물론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 5분의 1을 그대로 넘겨줘야 한다. 러시아만 이득을 보는 종전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홀로 하드캐리하던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면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기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도 어느 지점에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한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종결은 유럽에는 재앙이다. 무력으로 주권을 침탈하고 영토를 탈환할 수 있다는 선례를 러시아에 허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이 더 이상 NATO의 집단 안보를 위해 예산과 전력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에, 전력 공백은 이제 유럽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한다. 문제는 누가 이끌 것이냐다. 이미 독일은 1000억달러(약 139조8900억원)가 넘는 특별 자금을 투입하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대비와 자국군 현대화를 추진 중이지만, 독일 국민 70% 이상은 독일이 유럽연합(EU)의 군사적 리더가 되는 데 반대한다.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참전을 주장할 만큼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NATO의 리더를 맡기는 버겁다. 유럽 전체적으로 군비 증강은 있을지언정 집단 방어 역량 자체는 여전히 미지수인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인·태 지역과 한반도
미국의 주된 안보적 관심은 역시 중국이 될 것이다. 특히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트럼프 2기 정부는 전력 강화에 집중하는 가운데 경제 전쟁을 가속하면서 중국을 공략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을 위한 동맹의 기여도가 더욱 강조될 것이다. 미국 없이도 동맹이 결속을 유지하도록 하는 조 바이든 정부의격자무늬 동맹 구상은 사실 트럼프 2기 정부의 동맹 정책 기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 신조가 없는 일본이 트럼프 1기 정부처럼 인·태(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아시아판 NATO를 주장하던 ‘안보 전문가’ 이시바 시게루가 총리인 만큼, 자위대 역할에 대한 기대는 커질 수 있다. 일본이 굳건히 지키던 인·태 파트너 자리를 호주가 차지할 가능성도 있지만, 중도 좌파 성향의 앤서니 앨버니지 정부가 중국과 협력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다소 혼란스러운 입장일 수 있다. 비록 윤석열 정부 들어 대중 정책이 유화보다는 대응으로 바뀌었지만, 경제 분야의 디커플링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이 본격적인 인·태 전략의 파트너가 되기는 쉽지 않다. 바이든 정부로부터 워싱턴 선언과 핵협의그룹(NCG), 한미 핵공동작계지침을 끌어냈지만, 애초에 동맹 안보를 비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도 미국의 과감한 핵 보장이 지속될지 미지수다. 오히려 방위비 분담금 10배 인상이나 주한 미군 감축 같은 악재가 도사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미·북 간 관계 설정이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김정은과 친분을 과시했다. 대선 승리 이후 트럼프 진영에서는 북한과 대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심지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략적 가치를 높였기에 미·북 협상에 절대 불리하지 않다. 거래주의적 관점을 지향하는 트럼프 특성상 실현 가능성이 작은 북한 비핵화가 협상 내용에서 배제되고, 북한의 핵 동결과 우크라이나 철수가 미국의 대북 제재 완화·해제와 맞교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됐을 때는 우리에게 불리한 결과로 끝나게 될 수 있다.
한미의 공동 이익을 찾아라
결국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이 미국에도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한미 양국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만에 하나 핵 동결로 결론 나더라도 전제는 미국 전술핵 재배치나 핵 공유다. 상황이 극한으로 몰아치는 경우라면 한국의 독자 핵무장에 대한 미국의 후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제가 미국의 이익이 되려면, 미국 핵무기의 전진 배치나 한국의 독자 핵무장이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동맹국인 미국의 이익과 합치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는 중·러의 격렬한 반발과 국내 정치의 치열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2025년 이후 격동할 세계 안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개인이건 나라건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