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중년의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이혼한 남편은 재산 분할로 조금이라도 더 뜯어가려고 변호사를 내세워 닦달하고, 신인 시절 그녀에게 시그리드 역을 맡겨 최고의 배우로 성장시켜 준 연출가이자 정신적 스승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즈음 마리아는 20년 전 자신을 정상에 설 수 있게 해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무대에 캐스팅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제안된 역할은 주인공이 아닌 상대역, 시그리드의 매력에 빠져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중년의 헬레나다.
그녀는 배역을 거절하고 싶다. 언제까지나 시그리드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도 없지만, 부정의 바닥에는 나이 먹은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젊음에 대한 집착 그리고 헬레나를 연기했던 선배 배우가 작품을 끝내고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한 발 한 발, 시간을 꾹꾹 밟아 나이를 먹는다는 게 참 다행이다, 하고 안도감을 느껴본 적 있는가. 스무 살이던 젊은이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마흔이나 쉰 살의 중년이 되어 있다면, 세월의 간격과 무게를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루하루, 한 해 두 해, 차곡차곡 나이를 먹었는데도 문득 깨닫는 시간의 간극, 거울 속에서 젊음의 빛을 잃어버린 모습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이 나온다. 젊음이 소멸해 버린 중년의 마리아, 태양처럼 눈부시게 떠오르는 신인배우 조앤 그리고 세월의 시소, 이쪽과 저쪽에 타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처럼 보이는 매니저 발렌틴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현실과 연극을 넘나들며 시간을 헤엄친다.
헬레나 역을 맡기로 했지만, 마리아의 마음은 여전히 젊은 시그리드에게 머물러 있다. 마리아는 대본 연습을 하면서도 헬레나가 되기를 온 힘을 다해 거부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흘러가 버린 세월을 탓하며 어린아이처럼 쏟아내는 마리아의 투정이 발렌틴을 점점 힘겹게 한다.
“이미 최고의 배우잖아요. 왜 그렇게 젊음의 특권에 집착하세요?” 발렌틴은 세월을 관통한 것 같은 객관적 시선으로 나이 든 여배우를 다독인다. 그러나 제삼자이기에 가능한 관점이기도 하고, 조앤처럼 자만하진 않아도 그녀 역시 나이 들어감의 서러움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젊음의 빛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겨우 감정이입을 하고 무대 연습을 하던 마리아는 헬레나의 고통에 더 많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도록 어느 장면에서 몇 초만 더 머물다 천천히 퇴장해달라고 시그리드 역을 맡은 조앤에게 부탁한다. 그러자 젊은 배우가 조롱하듯 답한다. “누가 헬레나한테 신경 써요? 이미 볼 장 다 본 불쌍한 여자일 뿐인데요.”
괘씸하지만 마리아 자신도 젊은 날, 저토록 오만했을 것이다. 영원히 그녀의 소유일 것만 같았던 젊음의 당돌함은 이제 조앤과 발렌틴의 얼굴에서 빛날 뿐, 그녀의 청춘은 언제 시들어 버렸을까. 의지했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린 지금, 세월이 남겨준 공허를 인정하고 초라해진 자신을 받아들이는 건 왜 이토록 힘이 들까.
마리아와 발렌틴은 말로야 스네이크, 말로야 계곡의 구름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산을 오른다. 구름이 상징하는 것은 때가 되면 당연한 듯 왔다가 꿈처럼 사라지는 젊음, 영원히 지나가 버린 것 같지만 다시 환원되는 시간이다.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아무도 품을 수 없는 세월. 중년의 마리아는 이미 지나왔기에 볼 수 없고 발렌틴은 젊음, 그 자체이기에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화면 가득 폭포수처럼 흐르다가 안개처럼 밀려오고 뱀처럼 미끄러져 사라지는 말로야 스네이크를 목격하는 건 관객뿐이다.
독일의 실스마리아에 ‘니체 하우스’가 있다. 철학자 니체가 불안한 정신을 추스르며 요양하던 곳,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한 곳이다. 아무리 힘든 삶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더!’를 외치며 니체가 ‘영원회귀’를 착안하게 된 계기도 말로야 스네이크다. 지금 이생의 고통이 무한 반복된다 해도, 온통 상실과 절망뿐일지라도 ‘이생을 기꺼이 다시 한번 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완전히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니체와 실스마리아, 이 연결점을 찾을 때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가 더욱 선명해진다.
젊음에 집착하는 것, 화려했던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과거에 자신을 묶어두는 일이다. 정상만 바라보며 걸어온 마리아도 나이 먹는 걸 내리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상은 누구도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무대의 주연은 아니지만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자기 자리에 선다. 비로소 내리막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좁고 험한 오르막에 비해 숨을 헐떡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리막길이야말로 점점 더 편안하고 안전하고 광활한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젊음과 아름다움의 소멸에 적응해 가는 중년 여배우의 성장통처럼 보인다.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인연, 시간에 마모된 사랑 그래서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후회와 결핍조차 끌어안으며 성장해 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격려와 위로다. 언제의 나를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젊고 화려했던 과거의 나? 일생을 다 살아보고 초연하게 돌아보는 미래의 나? 나는 오직 지금 여기 존재할 뿐, 1초 전이 전생이고 1초 뒤가 내세다. 그런데 무엇을 잡으려 애달파했을까.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대신 온 마음을 다해 구름처럼 변화하는 눈앞의 생을 사랑한 적 있던가?
인생과 세월이 정해준 배역을 받아들이고 나면, 젊을 때는 눈부셔서 차마 보이지 않았던 성숙의 기쁨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구름이 악천후의 징후이듯, 세월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인생의 쓸쓸함만 남는다 해도 오늘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 기꺼이 보내고 반가이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인생이란 무대의 주인공이 나라는 걸 깨닫는다면, 얼마든지 즐겁게 춤출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