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성경을 믿든 안 믿든, 아기가 있든 없든 매년 이맘때면 세계 어디서든, 세계인 누구라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 거리는 산타클로스의 붉은색이나 징글벨의 황금색, 크리스마스트리의 초록색으로 물들어 가고, 여기저기 스피커에선 크리스마스 축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런 시청각이 지구촌을 눈꽃처럼 휘감는다. 그러면 우리 같은 필부필부는 ‘아, 한 해 잘 버텨냈다. (밖은) 춥지만 (맘은) 따뜻해지는 시즌이 마침내 왔다!’ 하는 어떤 안도감마저 품게 되는 것이다.
캐럴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아래 중에 어느 쪽인지.
“I don’t want a lot for Christmas/There is just one thing I need” 머라이어 캐리의 풍성하고 황홀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이하 All I Want…)’.
“Last Christmas/I gave you my heart~” 조지 마이클의 슬프면서 관능적인 음성이 열어젖히는 ‘Last Christmas’.
버스커 버스커의 장범준이 4월마다 ‘벚꽃 연금’을 타듯 매년 12월이 되면 이런 곡을 만들거나 부른 사람은 큰 수익을 벌어들인다. 그야말로 연말 보너스, 아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연말 연봉’에 가깝다.
빙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 5000만 장 넘게 팔려
캐럴 또는 크리스마스 노래의 탄생은 4세기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독교 최고의 축일인 성탄절에 교회에서 부를 노래로 태어난 캐럴이 범대중의 히트곡으로 사랑받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19세기 미국 작곡가 제임스 피어폰트가 만든 ‘Jingle Bells(징글벨)’가 거의 100년 가까이 캐럴의 상징이었다. 많은 음악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또 돈과 산업이 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 레코드와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음악(음반이나 음원)을 직접 팔 수단이 없었으므로 악보가 돈이 됐다. ‘헝가리 춤곡’의 악보를 팔아떼돈을 번 브람스가 자신의 멘티인 드보르자크에게 ‘슬라브 춤곡’을 써보라고 했고 이 ‘투자 컨설팅’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은 낭만주의 시대의 유명한 일화다.
대중 캐럴 시대의 새로운 고전은 1942년 탄생했다. 미국의 가수 겸 배우 빙 크로스비가 주연한 영화 ‘홀리데이 인’에서 처음 선보인 ‘White Christmas’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이 참전한 시점이었다. 당시 엄혹한 전장에서 첫 겨울을 맞은 장병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고향의 성탄절 정경을 떠올렸다. 이 싱글 음반은 발표 이후 26년이 되는 1968년, 판매고 3000만 장을 돌파했고 지금껏 실물 음반만 5000만 장 넘게 팔리면서 스트리밍 시대까지 넘어왔다.
음원 스트리밍 시대에 캐럴 산업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 드라마틱한 변화를 한방에 보여주는 키워드가 머라이어 캐리다. 1994년, 당대의 팝 디바 머라이어 캐리가 발표한 캐럴 앨범 ‘Merry Christmas’에실려 발표된 ‘All I Want…’는 즉각적으로 히트했다. 앨범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스테디셀러 캐럴이 됐다. 하지만 이 곡은 놀랍게도 빌보드 핫100(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정상은커녕 차트에 아예 진입조차 못 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곡이 싱글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여러 곡과 함께 앨범에는 실렸지만 (독립적) 싱글 음반으로 따로 발매되지 않아 핫100 등재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앨범에만 실려도 싱글 차트에 오를 수 있는 쪽으로 룰이 개정된 것이 1998년. 그래서 발표 6년이 지난 2000년에야 싱글 차트 83위로 늑장 진입했다.
다음부터의 스토리가 더 드라마틱하다. 인류 음악 소비의 정의와 양태를 송두리째 바꾼 밀레니엄 혁명을 어쩌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케이스 스터디도 된다. 2000년에 잠깐 고개를 들이밀었던 ‘All I Want…’는 무려 10년 이상 다시 차트 밖에서 ‘잠행’한다. 11년간의 침묵을 깨고 2012년, 빌보드 싱글 차트 21위로 복귀한다. 소셜미디어(SNS)와 스트리밍 서비스의 쌍끌이 덕이다. SNS는 쇼트폼 비디오를 비롯한 여러 포맷으로 젊은 세대에서 회자하기 시작했고, 무형의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는 CD 같은 유형 음반의 재생을 뛰어넘어 음악 소비의 주류가 됐다.
데이터를 보자. 2012년, 미국에서는 음반 산업 매출에서 스트리밍이 차지하는 매출이 처음 10억달러(약 1조3989억원)를 넘어섰다. 음반 산업 전체 매출 대비 스트리밍 매출 비중이 최초로 30%를 넘어섰다(전년 29%→당해 연도 32%). 여기 발맞춰 빌보드도 구닥다리 제도를 뜯어고친다. 음반과 디지털 다운로드만 계수해 반영하던 싱글 차트에 스트리밍 데이터를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변화다. CD나 LP를 사야만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내가 머라이어 캐리 음반을 1만5000원 주고 샀다면, 음반 시장에 내가 반영시킨 매출은 딱 1만5000원이다. 매년 12월 1000번씩 들어서 10년 동안 총 1만 번을 듣는다고 해도 여전히 내가 시장에 표출한 데이터는 영영 처음 소비액인 1만5000원에 머문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를 한 번 들을 때마다 그 기록이 플랫폼을 통해 매번 계수되면 다른 현상이 펼쳐진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12월 20일 무렵에 빌보드 싱글 차트 30위권, 20위권에 머물며 조금씩 올라오던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는 마침내 2017년 12월 16일 10위권(9위)으로 진입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발표된 지 무려 23년 만이다. 그리고 2019년 11월 23일, 일을 내고 만다.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밟은 것이다. 발표 사반세기(25년) 만의 기록. 이후 2023년까지 5년 연속 정상을 밟는다. 그 ‘역주행’ 시기도 11월 말로 한 달 가까이 앞당겨졌다.
2020년을 전후한 ‘캐리 캐럴’의 드라마틱한 역주행은 음반 산업 관계자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줬다. 카탈로그(옛) 음원에 대한 투자 심리를 폭발적으로 자극한 것이다. 2020년과 2021년 미국 음반 산업계에서는 음악 저작권과 판권의 매매 열풍이 이어졌다. 밥 딜런, 닐 영, 브루스 스프링스틴, 폴 사이먼(사이먼 앤드 가펑클) 등의 전설급 가수가 자신이 발표한 모든 곡에 대한 권리를 유니버설뮤직, 소니뮤직 등에 통으로 매각한 게 대표적이다. 아티스트당 거래가는 수억달러에서 수십억달러에 이르렀다.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에게서 틱톡을 위시한 숏폼 콘텐츠가 20세기 중반의 명곡은 물론 고루하다고 여긴 클래식 곡까지 자르거나 빨리 돌려 그 위에 춤을 추거나 재미난 해프닝 영상을 얹는 식으로 다시 프로모션됐다. 심지어 그 프로모션은 누리꾼의 자발적 행위였다. 틱톡 패러디 열풍으로 빌보드 차트를 역주행한 미국 그룹 플리트우드 맥의 ‘Dreams(1977년 발표)’, 그 무렵 머라이어 캐리 못잖은 캐럴 역주행 신화를 쓴 브렌다 리의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1958년 발표)’가 대표적 예다.
올 크리스마스에 거리는 어떤 색으로 물들까. 도시의 공기는 어떤 노래의 음파로 채워질까. 원색 조명의 루미나리에 주변에, 손에 들린 스마트폰과 귀에 꽂은 이어폰 속에 출렁이는 대기의 울림에 음악 콘텐츠 산업의 물결이 있다. 트렌드가 있다. 대중음악은 산업이다. 산업의 흐름은 기술 발달, 매체 변화, 플랫폼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캐럴의 산업화 그리고 캐럴 산업의 진화는 아기 예수의 탄생뿐 아니라 새로운 시장의 탄생과 명멸을 보여준다.
2025년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캐럴이 역주행할까. 그 캐럴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비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