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이하 현지시각) 미셸 바르니에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우파 내각이 무너졌다. 전날 하원에서 실시된 신임투표에서 전체 577석의 과반수를 충족하는 331표의 찬성으로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됐기 때문이다. 1962년 퐁피두 총리의 내각이 불신임으로 붕괴한 지 62년 만이다. 2017년 당선돼 현재까지 연임하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도 큰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소수내각이 갖는 불안정성이 1958년에 시작된 프랑스 5공화국 사상 최단명 총리라는 굴욕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미셸 바르니에는 누구인가. 73세의 우파 드골주의자 정치인으로서 프랑스 국회의원, EU집행위원, 장관, 심지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유럽연합(EU)을 대표해서 영국과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협상을 이끌었던 유럽의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그는 안정감 있고 타협과 절충에 능한 경험 많은 인사이기에, 젊고 패기 있지만 다소 돌출적인 마크롱을 잘 보완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바르니에 내각의 운명은 시작부터 불안했다.
처음부터 불안했던 바르니에 소수 연립내각
올해 6월 초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 자유주의 여당연합은 극우 국민연합에 득표율로는 14.6% 대 31.37%, 의석수로는 13 대 30이라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화가 난 마크롱 대통령은 선거 결과가 나온 당일 저녁, 임기가 3년이나 남아 있는 의회 해산을 단행하는 만용을 부렸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한 번 더투표해야 한다는 프랑스 선거제도에 따라 아무리 극우가 인기를 얻고 있어도 결국은 프랑스 유권자가 자신의 중도 정당을 지지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올해 7월 초 2차 투표까지 가는 조기 총선 결과, 마크롱의 여당연합은 250석에서 168석으로 축소됐고, 급진 좌파가 이끄는 좌파 연합 정당인 신민중전선이 149석에서 182석으로 1당이 됐다. 국민연합은 비록 3등이지만 88석에서 143석으로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마크롱으로서는 극우의 공세를 분쇄하려다가 좌파에 당한 꼴이다. 집권 여당연합은 종래의 250석을 버리고 168석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도대체 왜 이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순리에 따른다면 최대 다수당인 신민중전선에서 새 총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급진 좌파 멜랑숑 대표를 극우 정당만큼 싫어하는 마크롱 대통령은 총선 성적 4등에 불과한 우파 연합에서 새 총리를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바르니에에 대해 중도파와 우파, 극우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던 데 반해, 총리직을 빼앗긴 좌파가 격렬히 반발한 것은 물론이다. 선거 후 두 달 동안 지지부진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다가 9월 초에 간신히 소수 연립내각을 구성함으로써 바르니에 정부는 처음부터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정치적 위기
정치적 위기는 2025년도 예산 편성에서 비롯됐다. 올 10월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하면서 바르니에 총리는 총 600억유로(약 90조원)에 달하는 지출 삭감과 증세 계획을 공개했다. 안 그래도 저성장에 허덕이는 경제 상황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 적자가 버거운 정부의 처지를 고려해 400억유로(약 60조원)의 공공 지출을 삭감하고 대기업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200억유로(약 30조원)의 증세를 하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바르니에 내각에 적대적이었던 급진 좌파는 엄청난 규모의 공공 지출 삭감이 저소득층과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준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국민연합도 전력 소비세 인상이나 의약품비 환급 축소 같은 증세 계획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감소가 프랑스 사회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야당의 반대에 막혀 2025년도 예산안의 의회 통과가 어려워지자 바르니에 총리는 12월 2일 정부가 의회 표결 없이 단독 입법할 수 있도록 하는 헌법 49조 3항을 발동했다. 의회를 우회, 예산안을 확정하려는 시도였다. 결국 이런 시도가 곧 불신임 투표로 이어졌다. 이제 2024년이 며칠 남지 않아 사실상 시한 내에 내년도 예산이 합의 처리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 부재의 정치적 위기는 심화하고 있다.
경제 부진과 함께 찾아온 마크롱 정치 위기
2023년 기준 세계 7위 경제 대국인 프랑스는 3조달러(약 4288조원)가 조금 넘는 국내총생산(GDP)을 자랑하는 주요 7개국(G7)의 일원이자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의 일원이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경제 쇠락이 지속되어 1995년 미국과 거의 유사했던 일인당 국민소득이 2023년에는 미국이 100이라면 불과 57.6으로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에는 브렉시트로 위축되고 있는 영국보다도 더 가난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2017년 마크롱 집권 후만을 보더라도 프랑스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속에서 -7.6%의 역성장을 보여 선진국 중에서도 팬데믹의 악영향을 크게 받은 나라다. 그럼에도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성장률이 각각 6.8%, 2.6%, 1.1%로 완만한 포스트 팬데믹 회복세를 보였을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프랑스 경제는 2024년에도 1.1%의 성장률을 기록한 데 이어, 2025년과 2026년에 각각 0.8%와 1.4%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보다는 낫지만 미국이나 스페인 같은 역동성은 찾아볼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 재정이다. 2024년부터 2026년까지 당해 연도 재정 적자가 -6.2%, -5.3%, -5.4%로서 보통 GDP 대비3%를 적정하다고 보는 적자 규모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부채도 GDP 대비 112.7%에서 서서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적정 규모 60% 이내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바르니에 정부가 여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다가 야당 반대로 좌초한 상황이다.
당분간 해결책 보이지 않는 프랑스의 미래
현재의 의회 구도는 신민중연합, 중도자유주의연합 그리고 국민연합이 150석 내외에서 삼분하고 있는 형국이다. 대통령중심제로서, 합의보다는 위로부터 지시에 익숙한 프랑스 정치·문화에서 이러한 도토리 키 재기식 분할은 합의를 지극히 어렵게 하고 정치적 위기를 가중시키는 최악의 상황을 낳는다. 바르니에가 아니라 누가 와도 지극히 풀기 어려운 경제개혁과 재정 건전성 문제는 앞으로도 프랑스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조기 총선 2차 투표에서 역전패한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은 ‘우리의 승리가 단지 미뤄졌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2027년, 아니 마크롱 대통령이 만약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하야(下野)한다면 그 전이라도 대통령이 될 거라는 꿈을 키우고 있다. 이 꿈은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