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의 선구자인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의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한 과학자’ 로 불린다. 그의 전기를 읽고 미생물학자를 꿈꿨던 학생은 대학 입학 후 32년이 지나 신경계와 면역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신경면역학 분야의 세계적인 의사과학자가 됐다. 바로 허준렬(51) 미국 하버드대 의대 면역학 교수다.

허 교수는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나와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내는 세계적 뇌신경과학자인 글로리아 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다. 두 사람은 칼텍에서 함께 박사과정을 밟았다. 부부는 각자 전공인 면역학과 신경과학을 융합해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이 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밝히는 데집중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와 우울증, 알츠하이머병 같은 난치성 신경 질환 치료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최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에서 만난 허 교수는 “학계에서는 면역학과 신경학이 따로 발전했지만, 우리 몸에서는 두 시스템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며 “신경면역계가 앞으로 뇌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강력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신경면역학은 어떤 학문인가.

“신경면역학은 건강할 때와 질병이 있을 때 신경계와 면역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쉽게 말해 면역계가 뇌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뇌 질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연구하는 분야다. 면역계는 병원체의 정체를 알기 전부터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을 분비한다. 사이토카인은 원래 병원체를 공격한다고 알려졌는데, 뇌에서 사회성을 전담하는 영역의 활성도를 떨어뜨린다. 이러한 신경면역계 활동이 망가지면 우울증이나 치매 같은 현대인이 겪는 뇌 질환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학계는 면역 세포가 어떻게 뇌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신경면역학을 연구하는) 연구실을 열고 면역계가 뇌 기능이나 발달에 중요하다고 설명했을 때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신경면역학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주목받는 분야가 됐다.”

허준렬 미국 하버드대 의대 면역학 교수가 최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에서 열린 제12회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포럼(HIF)’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 사진 조선비즈
허준렬 미국 하버드대 의대 면역학 교수가 최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에서 열린 제12회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포럼(HIF)’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 사진 조선비즈

신경면역학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연구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인구의 약 3% 정도가 겪는데, 대개 언어 능력과 학습 능력, 사회성이 떨어지고 반복 행동을 보인다. 최근 우리 연구진과 최 교수팀, 공동 연구팀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 2152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 중 17%가 아파서 열이 날 때 자폐 증상이 호전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열이 날 때마다 건강한 아이처럼 말하거나 반복 행동이 줄어드는 것이다. 자폐 증상이 나아지는 현상은 열 자체가 아니라 면역계가 활동한 결과 중 하나다. 사이토카인의 일종인 인터류킨17(IL17)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동물실험으로도 증명했는가.

“우리 연구진은 유전적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게 하는 마우스 모델을 이용해 이를 증명했다. 다른 쥐와 어울리기 싫어하고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자폐 쥐에게 IL17을 주입하자, 자폐 증상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면역 세포가 굳이 뇌 안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이러한 뇌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도 밝혀냈다. 연구 결과, 뇌와 뼈 사이 뇌척수막에는 IL17을 분비하는 면역 세포가 풍부했다. IL17은 뇌 안으로 들어가 뉴런(뇌세포)의 수용체에 붙었다. 즉, 뇌 밖에서 면역 세포가 분비한 IL17이 뇌 안으로 들어가 뇌 기능을 조절하는 셈이다.”

이외에도 신경면역학으로 어떤 질병을 연구 할 수 있나.

“우리 연구팀은 자폐뿐 아니라 치매, 우울증, 파킨슨병,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루게릭병) 등 다른 뇌 질환에 대해서도 사이토카인의 역할이나 수용체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들 연구 결과를 통해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면역계는 뇌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강력한 열쇠가 될 것이다.”

허 교수는 2020년 바이오 기업 인테론을 설립해 신경 면역 시스템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중증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환자의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동안 신경면역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기업과 다양한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면역 세포가 사이토카인을 분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사진 셔터스톡
면역 세포가 사이토카인을 분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사진 셔터스톡

한국의사과학자 양성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가 있지만 환자 진료가 아닌 새로운 의료 기술, 신약, 첨단 의료 장비를 연구·개발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과학자이고, 세계 상위 제약 회사 10곳의 최고기술책임자 중 70%가 의사과학자다. 의학 부문에서 세계 선두 교육기관인 하버드대 의대가 서울대학교병원, 서울대 의대의 의사과학자 양성에 협력하도록 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하버드대를 설득했고, 서울대에 하버드대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할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그 결실로 올해 서울대의 의사과학자가 하버드대 의대에서 수련하는 연수 지원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앞으로의 목표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내가 잘하는 것으로 한국과 협력 분야를 더 넓혀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번에 처음 선발된 한국 의사과학자는 지난 9월부터 하버드대 의대 연구실에서 연수받는다. 한국 의대 교수와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힘을 합쳐 의사과학자 양성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지원 프로그램이 더 많이 생겨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각 분야에서 리더가 되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연수생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의대생 중 기초연구를 하겠다는 젊은 연구자가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제약·바이오 분야 연구개발(R&D) 경쟁력의 근간인 기초연구를 하는 젊은 연구자 양성을 위한 투자와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

한국의 바이오산업을 육성하려면.

“한국이 반도체 신화에 이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분야가 바이오다. 한국이 좀 더 큰 비전을 갖고, 연구자와 기업을 지원하면 좋겠다. 특히 의사과학자가 나중에 제약·바이오산업에서 활약할 연구 인프라(기반 시설)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 제약·바이오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만한 영역으로 빅데이터와 바이오뱅크(생물자원은행)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이 초대형 바이오뱅크를 구축하고, 활성화한다면 우수한 연구자와 글로벌 대형 제약사가 자연스럽게 유입될 것이다. 한국이 보유한 차별화된 데이터 경쟁력을 활용해야 한다. 이를 연계한 바이오뱅크 활용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세계 바이오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기반의 매우 크고 가치 있는 데이터 자원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개인 정보를 가린 데이터와 연계한 대규모 바이오뱅크를 구축하고 이를 연구와 기업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든다면, 큰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정아 기자

허지윤 조선비즈 기자

홍아름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