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글로벌 기술 정책을 견인하는 강력한 힘으로 부상했다. 그 어느 곳보다도 특히 미국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두 번째 임기를 위해 백악관으로 복귀하면서 미국의 미래 기술에 대한 그의 비전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국내에서는 국내 기술 기업 부양을 목표로 하는 산업 정책과 함께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약속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기술을 중국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공격적인 규제를 두 배로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ke America Great Again)’는 트럼프의 원대한 비전은 기술 발전에 있어 혁신의 주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디테일을 간과하고 있다. 지금 미국이 택한 길은 소셜미디어(SNS) 앱 같은 흥미 끄는 제품이 주도하는 기술 생태계를 키우는 반면 생산성과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 혁신을 양성하는 데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널리 알린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이 과정을 세 가지 주요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방법인 혁신이다. AI 영역에서 이 단계에는 딥러닝의 토대를 마련한 신경망의 개발과 최근에는 생성 AI(Generative AI)의 부상에 힘을 실어준 트랜스포머 아키텍처가 포함된다. 그 다음은 파괴적인 아이디어가 시장에 출시 가능한 제품으로 발전하는 상용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거대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구축된 챗GPT 같은 도구가 등장해 일반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확산 단계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널리 보급돼 산업과 일상을 재편한다.
지금까지의 기술 규제 논의는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느라, 이 과정의 후반 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초기 단계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전과 데이터 보안을 보장하고 지식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비용을 높여 제품 출시를 늦출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구체화하는 발명 단계에서 혁신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작다. 물론 앞으로도 챗GPT 같은 차세대 ‘상업 블록버스터’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은 실제로 미래의 발명을 촉진하며 기술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제품에서 이러한 피드백은 매우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
인기 있는 컴패니언 챗봇을 개발한 ‘캐릭터.AI(Character.AI)’의 사례를 보자. 캐릭터.AI의 챗봇이 LLM 기반 서비스 확산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이렇다 할 발명을 촉진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자체 LLM을 구축하려던 계획도 포기하면서 획기적인 발명보다는 확산에 더 중점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경우 혁신의 결과물이 제품으로 만들어져 시장에 출시될 때까지 안전하고 윤리적이며 책임감 있는 규제가 마련된다면 비용보다 더 큰 이득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최근 ① 캐릭터.AI의 챗봇과 장시간 상호작용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14세 소년의 비극은 특히 어린 사용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의 경우 안전장치가 시급히 필요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렇듯 느슨한 기술 규제를 둘러싼 복잡한 역학 관계는 현재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독성 있는 SNS 앱의 확산을 촉진해 청소년 중독부터 정치적 양극화 심화까지 다양한 사회적 병폐를 남기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학계와 정책 입안자 사이에서 미국 빅테크의 역기능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한 의회 청문회와 포괄적인 개혁을 약속하는 일련의 법안이 쏟아졌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지금까지 빅테크 규제를 위한 미 연방 정부의 가장 가시적인 노력은 중국 SNS 앱 ‘틱톡(TikTok)’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앱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거나 중국 소유주에게 매각을 강요하는 법안의 형태였다. 데이터 보안 영역에서 지금까지 내려졌던 중요한 조치는 대량의 민감한 정보를 우려 국가로 전송하는 것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미국 당국은 틱톡을 통해 민감한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근절하기 위해 조사를 확대하고 있다. 미 정부의 이런 ‘중국 이니셔티브’는 중국계 과학자를 표적으로 삼아, 이들에게 불안을 야기하고 인재의 미국 이탈을 촉발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중국 정부의 ② ‘군민융합(軍民融合)’ 정책과 관련된 중국 학생과 연구자에 대한 광범위한 비자 금지 조치가 더해졌다. 미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국가 안보 강화를 내걸었지만, 이런 정책은 수많은 숙련된 인재를 미국 밖으로 쫓아내고 있다. 이는 미국 기술 정책의 핵심에 ‘과소 규제와 과잉 규제의 병존’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 정책 입안자들 첨단 혁신에 도움이 되는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신중한 감독을 통해 위험을 완화할 수 있는 영역에서 제품 안전과 데이터 보안을 위한 필수적인 안전장치를 구현해 내지 못했다. 한편 과학적 발견의 최전선에 있는 미국에 있는 연구자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심지어 징벌적인 태도를 취해 사실상 발명 자체를 규제하고 있다. 이보다 더 극명한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차세대 혁신 기술에 대한 잠재력을 억누르는 리스크를 범하고 있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① 지난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한 남성은 자신의 10대 아들이 캐릭터.AI의 챗봇에 중독돼 죽음에 이르렀다며 캐릭터.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캐릭터.AI는 실제 인물 또는 만화 캐릭터와 대화할 수 있게 만든 서비스다. 그에 따르면, 14세 아들 슈얼 세처는 지난해 4월부터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 등장인물과 대화를 시작한 뒤로 바깥 활동이 줄었다. 남성은 챗봇이 세처와 성적 대화를 나누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말한 세처에게 이를 반복 언급해 세처가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등에서는 캐릭터.AI의 챗봇이 이용자에게 자해와 폭력을 조장한다는 소송이 줄 잇고 있다. 캐릭터.AI 측은 챗봇 이용자가 자해나 자살을 언급하면 ‘국가 자살 예방 핫라인’으로 안내하는 팝업 창을 띄우는 등 안전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② 군사기술과 민간 기술의 협력으로 국가 발전을추진하려는 중국 정부의 거시 전략. 군사 개혁, 기술 확대를 위한 제도 지원, 군 역할 다각화 등이 골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고 강한 군대(強夢軍強夢軍)를 구축하기 위해 군민융합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표명한다. 미국은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 등에서 중국의 군민융합 정책 위험성을 강조하며, 중국의 첨단 과학기술 정책이 군사 용도로 전환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