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안데스산맥이 보이고 다양한 생물이 공존하는 돈 멜초 포도밭 전경 / 돈 멜초
멀리 안데스산맥이 보이고 다양한 생물이 공존하는 돈 멜초 포도밭 전경 / 돈 멜초

매해 연말이면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발표하는 ‘올해의 100대 와인’ 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린다. 이번에는 어떤 와인이 1등을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낭보는 칠레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꺼운 팬층을 자랑하는 돈 멜초(Don Melchor) 2021년산이 1위에 오르며 ‘올해의 와인(Wine of the Year)’으로 등극한 것이다. 얼마 전 수도권에 첫눈이 펑펑 내린 날 돈 멜초의 대표이사 엔리케 티라도(Enrique Tirado)가 서울을 방문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잠시 짬을 내 필자의 단독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칠레산 프리미엄 카베르네 소비뇽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돈 멜초. 그 탁월한 품질의 비결이 무엇인지 티라도를 만나 들어 보았다.

'올해의 와인' 선정된 돈 멜초

돈 멜초는 남미 최대 와인 회사인 콘차 이토로(Concha y Toro)의 자회사다. 1883년에 설립된 콘차 이 토로는 데일리급인 카시예로 델 디아블로(Casillero del Diablo)부터 명품 알마비바(Almaviva)까지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다. 돈 멜초는 칠레 와인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생을 바친 설립자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1987년에 출시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7년을 함께한 티라도에게 돈 멜초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와인이다.

“100대 와인이 발표된 당일에야 소식을 전달받았다. 정말 기쁘고 큰 영광이다.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표는 돈 멜초가 생산되는 푸엔테 알토(Puente Alto)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돈 멜초 한 병에는 돌투성이의 척박한 땅, 안데스산맥의 시원한 바람, 포도를 가꾸는 사람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돈 멜초만의 맛을 내는 비결이다”라고 티라도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해시계 모양으로 식재된 돈 멜초 포도밭 / 돈 멜초
해시계 모양으로 식재된 돈 멜초 포도밭 / 돈 멜초

푸엔테 알토는 칠레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인 마이포 밸리(Maipo Valley) 안에서도 안데스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고도가 650m에 이르고 안데스산맥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 주는 이곳은 돌이 많아 배수가 잘되는 땅과 건조한 기후를 갖춰 풍미의 집중도가 탁월한 포도가 생산되는 천혜의 산지다. 그런 곳에서 돈 멜초는 들꽃, 새, 곤충과 함께 포도를 기른다. 여러 생물이 공존하며 자연이 살아 숨 쉬어야 포도가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연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섬세한 손길이 더해지면 마침내 돈 멜초라는 걸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끝없는 실험, 연구, 인내가 빚은 명작

티라도는 자신이 직접 그린 포도밭 지도를 보여 주었다. 1.27㎢의 포도밭을 무려 151개로 쪼갠 도면이었다. 그 넓은 땅을 일일이 밟고 만지고 파보지 않고서야 그런 분석이 가능할 리 없을 터. 

식재한 포도의 90%가 카베르네 소비뇽 한 가지인데 땅을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필자의 질문에 티라도는 한 덩어리의 땅처럼 보여도 밭의 위치에 따라 토질과 미기후(微氣候)가 달라 같은 품종을 심어도 포도의 생장이 다르고 맛에서도 차이가 난다고 답했다. 그러고 보니 돈 멜초는 복합미가 탁월하기로 유명한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블렌드의 대부분을 차지해도 풍미가 다채롭고 풍성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1 한식과 함께 돈 멜초를 소개하는 엔리케 티라도 돈 멜초 대표이사 / 사진 김상미. 2 돈 멜초는 다양한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 사진 김상미. 3 돈 멜초 2021 / 사진 돈 멜초
1 한식과 함께 돈 멜초를 소개하는 엔리케 티라도 돈 멜초 대표이사 / 사진 김상미. 2 돈 멜초는 다양한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 사진 김상미. 3 돈 멜초 2021 / 사진 돈 멜초

티라도의 연구와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8년 그는 해시계 모양의 독특한 포도밭을 건설했다. 1600㎡의 땅에 테두리의 줄 간격이 정확히 6도를 이루도록 총 900그루의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다. 이렇게 식재하면 중심부의 포도산맥 간격은 50㎝로 촘촘하지만 바깥쪽으로 갈수록 사이가 벌어져 가장자리의 포도산맥는 2m나 떨어져 있게된다. 티라도는 이 실험을 통해 해를 보는 방향과 재식 밀도가 포도의 숙성과 품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할 셈이다. 그 결과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화학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지속 가능 농법으로 더욱 건강하고 우수한 포도를 생산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돈 멜초의 탁월함은 블렌딩과 숙성으로 마무리된다. 블렌딩은 151개 구획마다 맛이 다른 카베르네 소비뇽을 섞는 일이다. 구획 중에는 과일 향이 더 진한 곳이 있는가 하면 향신료 향이 더 많은 곳도 있고 타닌이 더 강한 곳도 있다. 게다가 매년 날씨에 따라 포도 맛이 달라지니 해마다 모든 구획에서 생산한와인을 일일이 시음하고 블렌딩 비율을 새로 짜야 한다. 극한의 인내심과 꼼꼼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블렌드한 와인은 약 15개월간 배럴에서 숙성을 거친 뒤 병에 담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티라도와 함께 맛본 돈 멜초 2021년산은 입에 대기도 전에 코로 전해진 아로마만으로도 그 우수함을 증명했다. 검은 자두, 체리, 블랙베리, 산딸기 등 온갖 열매가 뒤섞인 듯 과일 향이 풍성하고 제비꽃, 시나몬, 초콜릿 등 다양한 풍미가 우아하게 복합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한 모금 머금자 매끄럽고 탄탄한 질감과 묵직한 보디감이 달콤한 과즙과 함께 입안을 기분 좋게 채웠다. 와인을 목으로 넘긴 뒤에는 향긋하고 감미로운 여운이 입안을 끝없이 맴돌았다. 육류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와인이지만 계피 향이 은은한 한과와 즐기니 그 또한 색다른 별미였다.

아쉽게도 2021년산은 이미 품절이다. 하지만 돈 멜초는 와인 스펙테이터 올해의 100대 와인 중 10위 안에 이미 세 번이나 들었을 정도로 품질이 입증된 와인이다. 곧 2022년산이 출시된다. 평년 대비 서늘한 빈티지인2022년산은 과연 어떤 맛과 향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줄지 벌써 기대가 앞선다. 그때 다시 한번 돈 멜초로 우아한 건배를 들어볼 생각이다. 안데스산맥의 신선한 바람을 오감으로 느끼며, 살루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