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말 폭설에 쓰러지고 가지가 부러진 필자 집 옆의 소나무 / 사진 홍광훈
지난 11월 말 폭설에 쓰러지고 가지가 부러진 필자 집 옆의 소나무 / 사진 홍광훈

당(唐) 초기의 이교(李嶠)는 ‘송(松)’이란 율시(律詩)에서 소나무를 군자로 칭하며 그 강인하고 의연한 풍모를 크게 기렸다. “높은 바위 겉에도 울창하고, 깊은 계곡 가에도 빽빽하다. 두루미는 군자의 나무에 깃들이고, 바람은 대부의 가지를 스쳐 간다. 백 자의 잔가지 그늘이 모여, 천년의 덮개 그림자 드리운다. 한 해 저무는 추위에도 끝내 바뀌지 않으니, 그 굳센 절개 그대가 알기만을(鬱鬱高巖表, 森森幽澗陲. 鶴棲君子樹, 風拂大夫枝. 百尺條蔭合, 千年蓋影披. 歲寒終不改, 勁節幸君知).” 혹독한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꿋꿋한 모습이 군자를 닮았다는 것이다. ‘대부의 가지’란 ‘사기(史記)’에서 비롯됐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제천 행사를 위해 태산(泰山)에 올랐던 진시황이 폭풍우를 만나 소나무 밑에서 쉬었다고 하여 그 나무를 대부에 봉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 뒤 이백(李白)도 소나무를 군자와 연결시켜 지인에게 그 정신을 배우라고 타일렀다. ‘증위시어황상(贈韋侍禦黃裳)’ 2수의 첫째 시에서다. “화산에 긴 소나무 생겨나, 꼿꼿이 서리와 눈을 견딘다. 하늘이 백 자 높이를 주었으니, 어찌 하찮은 회오리에 꺾이랴? 복숭아와 오얏은 따뜻한 햇볕 속에 아름다움 팔아, 길 지나는 사람도 가다가 홀린다. 그러다가 봄빛이 땅을 쓸어 다하면, 푸른 잎은 누런 진흙이 된다. 바라노니 그대 긴 소나무를 배워, 삼가 복숭아와 오얏처럼 되지 말지니라. 어려움 겪어도 마음 바뀌지 않으면, 그런 다음에야 군자를 안다오(太華生長松, 亭亭凌霜雪. 天與百尺高, 豈爲微飆折. 桃李賣陽艶, 路人行且迷. 春光掃地盡, 碧葉成黃泥. 願君學長松, 愼勿作桃李. 受屈不改心, 然後知君子).” 권세가에게 아첨하기 좋아하던 위황상을 향해 우정 어린 충고를 한 것이다.

후한(後漢) 말의 대표적인 문인들인 건안칠자(建安七子) 중의 유정(劉楨)은 ‘종제에게 주다(贈從弟)’라는 시에서 역시 소나무를 군자처럼 묘사하며 사촌 동생이 이를 본받도록 권유했다. “산 위의 꼿꼿한 소나무, 골 안의 쌀쌀한 바람. 바람 소리는 어찌 저리 크고, 솔가지는 어찌 저리 굳센가? 얼음 서리 한창 심하게 몰아쳐도, 한 해가 끝나도록 늘 바른 모습이구나. 어찌 엉겨 붙은 추위를 겪지 않겠느냐만, 소나무와 잣나무에는 타고난 본성이 있다네(亭亭山上松, 瑟瑟谷中風. 風聲一何盛, 松枝一何勁. 冰霜正慘淒, 終歲常端正. 豈不罹凝寒, 松柏有本性).” 

소나무와 군자를 나란히 언급한 사례는 ‘순자(荀子)’에 처음 나온다. ‘대략(大略)’ 편의 다음 구절이다. “한 해가 다해 추워지지 않으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알 수 없고, 일이 어렵지 않으면 군자가 하루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없다(歲不寒無以知松柏, 事不難無以知君子無日不在是).” 이 구절의 원형은 물론 “한 해가 다해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이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 편에 실려 있다. 소나무를 잣나무와 병칭하는 것은 ‘시경(詩經)’에서부터의 습관이다. ‘천보(天保)’ 편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무성하듯이, 그대 또한 길이 이어지리라(如松柏之茂, 無不爾或承)”는 말이 있고, ‘비궁(閟宮)’ 편에는 “조래산의 소나무, 신보산의 잣나무(徂徠之松, 新甫之柏)”라는 구절이 있으며, ‘은무(殷武)’ 편에는 “저 경산에 오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높고도 꼿꼿하구나(陟彼景山, 松柏丸丸)”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렇게 엄혹한 추위도 멋진 자태로 굳세게 견뎌내는 소나무는 겨울의 자연경관을 훌륭하게 장식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중국 동진(東晉) 말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다음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그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다. “봄물은 사방 못에 가득 차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자욱하다.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날리고, 겨울 영마루에는 외로운 소나무 빼어나다(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홍광훈 -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이 시는 도연명의 작품이 아닐 것이라고역대로 많은 사람이 의심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당 초기에 편찬된 ‘예문유취(藝文類聚)’ 에는 이 시가 도연명보다 10여 세 많은 저명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으로 인용돼 있다. 여기에는 ‘신정시(神情詩)’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외로운 소나무’가 ‘찬 소나무(寒松)’로 표기돼 있다.

이러한 소나무가 많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나무 중에서 가장 빼어나게 보였다. 그래서 ‘사기’의 ‘구책열전(龜策列傳)’에서는 공자의 입을 통해 “소나무와 잣나무는 백 가지 나무의 으뜸(松柏爲百木長)”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만큼 소나무는 가장 높고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이 부조리를 3세기 후반 진(晉)의 좌사(左思)는 8수의 ‘영사시(詠史詩)’ 제2수 앞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거진 계곡 밑의 소나무, 수북한 산 위의 싹. 저 한 치 지름의 줄기로, 이 백 자 높이의 가지를 가린다(鬱鬱澗底松, 離離山上苗. 以彼徑寸莖, 蔭此百尺條).” 그러면서 세상사에 빗대어 “세습 귀족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뛰어난 인물은 아래 무리에 잠겨 있다(世冑躡高位, 英俊沉下僚)”고 탄식한다. 

당 중기의 백거이(白居易)는 ‘간저송(澗底松)’이란 시가로 좌사의 뜻을 부연, “백 자 높이 소나무 있어 열 아름이나 큰데, 골짜기 밑에 앉았으니 춥고도 비천하다(有松百尺大十圍, 坐在澗底寒且卑)”고 읊었다. 그리고 “누가 저 아득한 조물주의 뜻을 알리오? 그저그에게 재질을 주고 지위는 주지 않았으니(誰喻蒼蒼造物意, 但與之材不與地)”라고 원망한다. 이어서 “높은 자가 반드시 현명하지는 않고, 낮은 자가 반드시 우매하지도 않다(高者未必賢, 下者未必愚)”고 합리적이지 못한 세태를 야유하고 있다.

안팎으로 훌륭한 자질과 특성을 갖춘 이 소나무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당 중기의 승려 시인 교연(皎然)은 절구 ‘희제송수(戯題松樹)’에서 소나무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소나무 소리 좋아해 들어도 모자라서, 매번 소나무 만나면 마침내 돌아갈 일도 잊어. 홀가분한 마음 이밖에 무엇을 구할까? 웃으며 뜬구름 보니 나처럼 한가롭구나(爲愛松聲聽不足, 每逢松樹遂忘還. 翛然此外更何事, 笑向閑雲似我閑).”

당 후기의 이상은(李商隱)은 먼 객지에서 가족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송(高松)’이란 율시의 앞에서 “높은 소나무 뭇 나무들 속에서 빼어나, 나와 짝하여 저 하늘 끝을 향하고 있다(高松出衆木, 伴我向天涯)”고 애틋하게 나타냈다.

당 말기의 최도(崔塗)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가 오래된 소나무를 보고 좋은 나머지 한 수의 율시를 지어 떠나오기 섭섭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맑은 그늘 밑에 아쉽게도 머물 수 없어, 해 질 녘 성으로 돌아가며 헛되이 고개를 돌려보네(淸蔭可惜不駐得, 歸去暮城空首回).”

남송 초의 신기질(辛棄疾)은 어느 날 소나무 밑에서 혼자 술 마시고 즐겁게 노는 장면을 이렇게 노래했다. “취한 가운데 잠시 즐거움과 웃음을 탐하노라니, 근심하려 해도 어찌 그럴 틈이 있겠는가? 요즘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됐도다. 옛사람 책은 전혀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을(醉裏且貪歡笑, 要愁那得工夫. 近來始覺古人書. 信着全無是處). 어젯밤 소나무 옆에서 취해 쓰러져, 소나무에게 내가 얼마나 취했냐고 물었소. 얼핏 보니 소나무가 와서 부축하려는데, 내가 손으로 밀어 가라고 했다오(昨夜松邊醉倒, 問松我醉何如. 只疑松動要來扶. 以手推松曰去).” ‘견흥(遣興·흥을 펼침)’이란 부제가 붙은 ‘서강월(西江月)’ 곡조의 사다. 

중국에서 애국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남송 말의 임경희(林景熙)는 ‘왕운매사기(王雲梅舍記)’라는 글에서 한 지인의 일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 거처에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매화나무 백 그루를 심어 높은 소나무와 죽 뻗은 대나무를 합쳐 추위 속의 친구로 삼았다(即其居累土爲山, 種梅百本, 與喬松修篁爲歲寒友).” 이른바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

소나무가 좋기는 하지만, 필자에게는 지난 몇 년 동안 큰 골칫거리가 되어 왔다. 집 옆 야산의 키 높은 소나무 세 그루가 오후 햇볕을 가려 겨울에는 난방비가 많이 들고 식물 기르기도 어려웠다. 그러다가 지난 11월 말의 큰 눈에 그중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머지 두 그루도 가지가 많이 부러졌다. 개인적으로는 퍽이나 고마운 폭설이었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