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일부 브랜드는 이 시간을 참고 기다린다. 이윤에 현혹되거나, 수익성을 두고 갈팡질팡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증류소는 문을 닫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숙성하던 원액은 다른 누군가 손을 타고 후대에 이어진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 발렌타인(Ballantine’s)은 ‘마스터클래스 컬렉션(Mas-terclass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2023년 40년 숙성한 고연산(高年産) 위스키 시리즈를 처음 선보였다. 이름처럼 최소 40년 숙성한 원액으로 그레인 위스키와 몰트위스키를 섞어 만든 블렌디드 위스키다. 시리즈 첫 제품 ‘더 리멤버링(The remembering)’은 발렌타인을 세우고, 브랜드 가치를 지켰던 이전 마스터 블렌더에게 대한 예우와 기억을 담았다. 이 제품은 2000만원을 훨씬 웃도는 고가임에도, 2023년 발매 당일 국내 배정 물량 여섯 병이 모두 팔렸다. 이후 추가로 배정한 다섯 병도 매진됐다. 2024년 내놓은 시리즈 두 번째 제품 ‘더 웨이팅(The Wating)’은 기다림이 가진 미학(美學)을 조명했다.
마스터클래스 컬렉션을 총괄한 샌디 히슬롭(Sandy Hyslop) 시바스 브라더스 블렌디드 스카치위스키 총책임자를 최근 만났다. 그는 발렌타인 위스키 시리즈 블렌딩을 총괄하는 마스터 블렌더이기도 하다. 블렌더란 다른 장소, 다른 참나무통에서 각각 숙성해 여러 위스키를 섞어 개성 있는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주질(酒質)에 관한 최종 결정권자다. 그는 “위스키 블렌딩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수”라며 “황홀한 풍미를 끌어내기 위해 40년 이상 숙성한 원액을 엄선해 수백 번 섞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발렌타인 40년 마스터클래스 컬렉션을 시작한 이유는.
“상징적인 스카치위스키 브랜드 발렌타인의 역대 마스터 블렌더들을 헌정하기 위해 기획했다. 그들이 보여준 지혜와 전문성을 기리고 싶었다.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 동안 다섯 가지 발렌타인 위스키 핵심 기술을 바탕으로 매년 새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다섯 가지 핵심 기술은 어떤 것인가.
“내 멘토이자 발렌타인 3대 마스터 블렌더였던 잭 가우디가 전수한 핵심 기술 다섯 가지에서 착안했다. 이 핵심 기술은 증류소와 참나무통(캐스크·cask), 스토리에 중점을 뒀다. 2023년 처음 선보인 더 리멤버링은 향을 기억하는 기술을 담았다. 이번에 소개한 더 웨이팅은 하나의 블렌딩 위스키가 탄생하기까지 필요한 수많은 시간과 기다림을 표현했다. 앞으로 소개할 나머지 에디션은 훌륭한 마스터 블렌더가 가져야 할 자질에 해당하는 열정, 정확한 타이밍, 미래를 위한 시간 투자 같은 의미를 담아내려 한다.”
더 웨이팅과 더 리멤버링은 기술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
“향을 기억하는 기술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더 리멤버링’은 잭 가우디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았던 덤버턴 증류소 위스키 영향을 받았다. 이 제품은 내가 위스키 업계에 몸담은 지 40년을 맞이해 탄생한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제품이기도 했다. 더 리멤버링은 호화로울 만큼 풍성한 과실 향을 강조했다. 여기에 신선한 살구, 달콤하고 고소한 참나무통 풍미 그리고 향신료를 더한 빨간 사과 향 등이 균형을 맞추는 위스키다.
반면 더 웨이팅은 발렌타인이 브랜드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우리가 깊어지는 시간(Time well Spent)’을 보여주기 위해 집중했다. 블렌디드 위스키 하나를 완성하려면 원액 증류부터 참나무통 관리, 숙성, 마지막 블렌딩 등 전 과정에서 수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 오랜 기다림을 표현하기 위해 지금은 사라진 증류소를 포함해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희귀한 위스키 원액을 직접 선별했다.
더 웨이팅은 발렌타인이 가진 고유한 스타일을 구현하기 위해 미국산 참나무통에서 숙성했다. 그 결과 사과파이나 자두잼 같은 묵직한 달콤함이 느껴진다. 목 넘김 후에는 은은한 훈연 향이 길게 이어진다.”
기다림이라는 추상적인 요소를 위스키 제조 과정에서 표현하기 어렵지 않았나.
“기다림은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오길 바라는 행동이다. 위스키를 완성하려면 수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교차한다. 가장 좋은 풍미에 도달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하루에 수백 가지 샘플을 확인하면서 그저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 겉에는 스코틀랜드 출신 유명 아티스트 카일라 맥캘럼이 직접 만든 3D 페이퍼 아트를 적용했다. 그녀는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에서 영감을 얻어 시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했다.”
발렌타인은 저렴한 제품부터, 프리미엄 제품까지 폭넓은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전 제품에 걸쳐 균일하게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관리하는가.
“위스키는 언제나 균일한 맛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매일 수백 개 샘플을 맛보고 구별하고 관리한다. 단순히 맛을 구별하는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각 샘플이 가진 향과 맛을 기억해 새로운 블렌딩을 창작하기도 하고, 기존 블렌딩이 가진 풍미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연구한다.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친 여러 증류소를 돌아다니며 새 원액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탐구하는 것도 마스터 블렌더가 가진 사명 가운데 하나다.”
발렌타인 40년 마스터클래스 컬렉션은 어떤 소비자를 위한 제품인가.
“발렌타인 40년 마스터클래스 컬렉션은 기존 발렌타인 17년, 30년 같은 제품을 좋아했던 이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미 고연산 발렌타인 위스키가 가진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춘 소비자가 대상이다. 이들 인생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순간이 있을 때, 이 위스키가 가장 완벽한 선택이 되길 바란다.”
더 웨이팅을 마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추천한다면.
“더 웨이팅은 고연산 위스키가 가진 강렬함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물에 희석하지 않는 캐스크 스트렝스 방식을 채택했다. 그 풍미를 그대로 즐기려 그 어느 것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NEAT·니트)나 온더록스(on the rocks)로 즐길 것을 추천한다. 응축한 향기를 더 풍부하게 즐기려면 생수를 몇 방울 떨어뜨려 향을 극대화하는 방법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