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 겸재 정선은 평생을 사귄 벗이었던 시인 이병연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이병연의 집 마당은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을 한 폭에 담은 산수화, ‘인왕제색도’의 유래로 알려진 이야기다. 인왕제색도는 1984년 국보 제216호로 지정됐다. 삼성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에 전시돼 있다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한 후 2021년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가에 기증됐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진경 산수화의 정수로 손꼽히는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일반인도 소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생겼다.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예술형 요판화’다. 요판화는 음각 판화 기법을 활용한 판화를 말한다. 지폐 전면의 인물과 후면의 그림을 새길 때 이 기법이 사용된다. 음각 판화로 찍기 때문에 이미지는 볼록하게 구현된다.
한국조폐공사는 새해를 맞아 두 번째 작품을 준비 중이다. 첫 작품이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라면, 제2탄은 인왕산에서 살았을 법한 동물, ‘호랑이’가 주인공이다. 바로 ‘맹호도’다. 호랑이는 한국을 상징하는 영물로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새해 복을 빌며, 가정을 지키고 불운을 쫓아내는 ‘세화(歲畵)’의 소재로도 자주 쓰였다. 인왕제색도 ‘완판 행진’을 맹호도도 이어갈 수 있을까. 한국조폐공사의 예술형 요판화 사업을 기획·총괄하는 가성현 책임연구위원을 만나 요판화 제작 계기와 과정을 들었다.
가 책임은 요판화 제작 과정을 ‘한 땀 한땀 수를 놓는 과정’이라고 소개했다. 판화를 새길 합금판을 평탄화하는 작업부터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화를 새길 합금판을 준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판화에 새길 그림의 이미지 해체 작업이 진행된다. 요판화는 점과 선만으로 이미지를 구현한다. 해체 작업은 어떻게 점을 찍고, 선을 그어야 가장 정확하게 작품을 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한 장의 이미지를 해체하는 데만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체한 이미지를 합금판에 새기는 데 또 3개월이 소요된다. 합금판원판을 만드는 데만 6개월, 시간과의 싸움이다. 인왕제색도는 색의 농도와 명암을 표현하는 게 숙제였다면, 2탄으로 준비하는 맹호도는 호랑이 털의 질감을 구현하는 게 과제라고 가 책임은 설명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인왕제색도 요판화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판매 성과가 어떤가.
“2024년 10월 제작한 인왕제색도 요판화를 대형(824×546㎜)과 중형(526×356㎜), 소형(310×196㎜) 세 가지 규격으로 제작했다. 대형은 300점, 중형은 500점, 소형은 2000점 한정으로 제작했다. 대형과 중형은 모두 완판됐고, 소형은 온라인에선 품절이다. 일부 오프라인 매장에만 소량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격은 얼마인가.
“대형이 약 50만원, 중형이 25만원, 소형이 5만원에 판매됐다(정확한 가격은 대형 49만5000원, 중형 24만5000원, 소형 4만9500원).”
요판화 작업은 어떻게 하나.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무엇인가.
“판화를 새길 판을 준비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평평해 보이는 합금판을 거친 사포(샌드페이퍼)부터 해서 부드러운 사포로 ‘방(사포의 거친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 수를 높여가며 평탄화를 한다. 그러다 보면 기포처럼 볼록 나온 부분이 생긴다. 그러면 또 다듬고, 이 작업을 계속하면 아주 평평해진다. 이후에는 고운 면포로 계속 닦는다. 반짝반짝 광이 날 때까지 닦으면, 드디어 그림을 새길 판이 준비된 것이다.”
판 준비에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 이미지는 어떻게 옮기나.
"판화를 새길 합금판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판화에 새길 그림을 해체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요판화는 점과 선만으로 이미지를 구현한다. 어떻게 점을 찍고, 선을 그어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이미지를 구현한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이미지를 해체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 밑그림이 나오면, 이걸 합금판에 새기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도 3개월 이상 소요된다. 깨끗하고 평탄하게 만든 합금판에 10㎛(마이크로미터·0.01㎜) 단위로 음각 조각을 하게 된다. 이런 디테일이 위조를 방지하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우나.
“나는 미대를 나왔다. 1996년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해 지금까지 계속 요판 제작을 했다. 예술형 요판화 제작자 서명을 한 신인철 디자이너도 미대 출신이다. 입사 초기에는 요판을 파는 작업은 하지 못하고, 합금판을 닦으며 선배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다.”
예술형 요판화 사업은 이번이 처음인가.
“처음은 아니다. 공사에선 2000년대 중반부터 홍보·기념품 용도로 예술형 요판화 비매품을 제작한 바 있다. 이중섭의 ‘황소’,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줍기’,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등 유명 작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판매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매용 명화 요판화 제작이 사업 본격화 전 시장조사가 된 셈이다.”
제작할 때 대형과 중형, 소형을 나누게 된 배경이 있나.
“대형과 중형은 세밀한 이미지 구현으로 예술성에 중점을 뒀다. 소형은 대중성을 겨냥해 숨은 그림을 새겨 넣으며 재미 요소를 추가했다. 시중에 아트프린팅(상업 인쇄) 작품이 많다. 이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요판화에 화폐와 관련한 이미지를 일러스트처럼 넣었다. 프랜차이즈 영화의 쿠키 영상처럼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작은 그림도 넣었다. 소형 제품은 아무래도 젊은 층이 많이 선호할 거로 봐서 이런 재미 요소를 넣었다.”
호랑이 그림도 있는 듯하다.
“인왕산 호랑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음 작품의 예고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이 호랑이와 관련된 것인가.
“그렇다. 새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맹호도’를 예술형 요판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현재 이미지를 해체해 밑그림을 구상하는 중인데, 맹호도 속 호랑이 털을 어떻게 구현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이 많다.”
제작 과정 설명을 들으니, 기술력도 예술성도 필요해 보인다. 본인은 기술자와 예술가 중 어디에 속한다고 보나.
“우선 위조 방지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아울러 훌륭한 미술 작품을 재창조할 수 있는 예술적 능력도 필요하다. 약간 민망하긴 하지만, 기술 예술가 혹은 예술 기술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