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영국 자산운용사 옥토퍼스그룹의 투자로 설립된 옥토퍼스에너지(Octopus Energy·이하 옥토퍼스)는 설립 10년도 채 되지 않아 영국 1위 에너지 업체로 성장했다. 설립 초기에는 외부 발전사에서 전기를 떼어다 소매시장에 판매하는 전력 도매 업체였는데, 지금은 풍력·태양광 등 친환경 발전소를 직접 운영하는 영국의 거대한 ‘에너지 공룡’ 으로 성장했다. 옥토퍼스의 기업 가치는 최근 90억달러(약 13조원)에 달했다.
영국 전력 시장은 소비자가 전기 공급사를 선택할 수 있는 경쟁 시장이다. 매달 전기 요금 고지서를 보면 회사가 어떤 자원으로 전기를 생산하는지, 발전 단가가 얼마인지, 경쟁 회사보다 전력을 싸게 공급하고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화나 애플리케이션(앱)으로 회사를 바꿀 수 있다. 그동안 영국 전력 시장은 브리티시가스, EDF에너지, E.ON(에온), OVO에너지, 스코티시파워, SSE 등 빅6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러나 옥토퍼스의 등장으로 영국 전력 시장은 큰 변화를 맞았다.
옥토퍼스가 영국 최고 에너지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그 무기로 인공지능(AI) 에너지 플랫폼 자회사 ‘크라켄 테크놀로지(Kraken Technolo-gies·이하 크라켄)’를 지목한다.

크라켄, 아마존·우버와 같다
크라켄은 옥토퍼스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그레그 잭슨(Greg Jackson)과 최고기술담당임원(CTO) 제임스 에디슨(James Eddison)이 사내 기술 플랫폼으로 창업했다. AI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 에너지 소비를 예측하고, 공급을 최적화하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이후 잭슨 CEO가 “크라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라고 말할 정도로 옥토퍼스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에너지산업에 문외한이었던 잭슨이 옥토퍼스를 설립한 건 거대 변화에 직면한 유틸리티 산업(가스·전기 같은 공공재 생산 산업)에 소프트웨어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옥토퍼스 등장 전까지 세계 전력 시장의 구조는 간단했다. 정부 주도로 도시 외곽에 건립된 거대한 석탄·가스·원자력발전소가 전력을 생산해 수백만 가정과 사업체에 전기를 전송하는 식이다. 그런데 에너지 전환과 함께 예측 가능한 전력 공급 구조가 변했다. 수백만 개의 소규모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시설이 전력을 생산하면서 에너지가 중앙 집중식에서 분산형으로 바뀌었다. 각 가정이 생산자 역할도 맡으면서 에너지 흐름이 발전소에서 소비자로 향하는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으로 흐른다.
이런 변화는 전력망(그리드)의 안정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전기차와 히트펌프(열펌프), 태양광 패널 등 수백만 기기의 수요와 출력을 관리해야 한다. 물리적인 인프라 개선과 함께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대부분 에너지 업체가 수십 년 전 구축한, 오래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잭슨 CEO는 기존 전력 회사의 한계를 간파하고, 크라켄이라는 소프트웨어 플랫폼 회사를 세워 전통적인 전력 공급사와 경쟁에 나섰다.
데브림 셀랄(Devrim Celal) 최고마케팅담당임원(CMO)은 “과거엔 전력 수요에 따라 발전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었는데, 태양이나 바람으로 전력을 더 많이 생산하는 지금 시스템에서 에너지 공급·수요 관리는 훨씬 복잡해졌다”라며 “발전원이 분산돼 있고 전력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정교한 소프트웨어의 필요성이 커졌다”라고 설명했다. 크라켄의 기술은AI를 이용해 그리드를 예측하고 최적화하는 게 핵심이다. AI가 실시간으로 에너지 흐름을 관리해 전력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물리적 전력망을 무한대로 확충해야만 그리드 안정성이 확보된다. 크라켄 덕분에 옥토퍼스는 10년도 안 돼 전 세계 9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했다. 이런 크라켄을 잭슨 CEO는 아마존, 우버 같은 테크 기업으로 설명한다.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에너지산업에 혁신을 불러온 소프트웨어 플랫폼이라는 점에서다. 크라켄은 현재 30만 개 이상의 전력 자원(DER)과 50(기가와트) 이상 규모의 전력을 감독하고 있다. 통상 원전 1기의 발전 용량이 1가 조금 넘는다.

우리 집 전기료 낮추는 AI
크라켄은 그리드의 안정성은 높이고, 전력 요금은 크게 낮췄다. AI가 전력 공급과 수요를 예측해 전력 요금이 쌀 때 사용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옥토퍼스에서 전기를 공급받는 고객은 전력 수요가 피크(정점)에 도달하기 전, 앱을 통해 사전 안내를 받는다. 전력 수요가 피크에 도달하면 전력 판매 가격이 높아져, 이때 사용자가 불필요한 전력 소비를 줄여 전기 요금도 절약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크라켄은 집이나 사무실을 작은 발전소로 변신시켰다. ‘아웃고잉 옥토퍼스(Outgoing Octopus)’는 집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이나 에너지 저장 장치(ESS)에 남은 전력을 공유해 전력을 되팔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셀랄 CMO는 “크라켄 기술을 통해 소비자는 가장 저렴하고 친환경적으로 전기를 쓰는 것뿐 아니라 생산자 역할도 한다”라며 “동시에 공급자는 전력망 과부하를 방지할 수 있다”라고 했다.
맨체스터 기술 허브, 전기차·배터리 제조사와 협력
미래 에너지 시장의 주인공은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가 아니라 에너지 수요·공급을 정확히 예측하고 그리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이라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크라켄은 모회사 옥토퍼스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옥토퍼스의 글로벌 고객은 900만 명이지만, 크라켄이 관리하는 고객 계정은 6000만 개에 달한다. 크라켄은 옥토퍼스와 경쟁 관계에 있는 EDF에너지와 E.ON넥스트, 오리진, 도쿄가스를 모두 고객사로 뒀다. 한화에너지 호주 법인의 전력 소매 사업자 넥타(Nectr)도 크라켄의 고객이다. 크라켄은 수도·통신 분야로도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크라켄은 에너지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다양한 제조사와 통합 작업을 펼치는 중이다. 최근에는 맨체스터에 에너지 기술 허브(EnTech superhub)를 세웠다. 크라켄 엔지니어링 통합 이사인 앤디 몰리뉴(Andy Mo-lineux) 박사는 2024년 11월 중순 맨체스터 기술 허브에서 기자와 만나 “크라켄은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생산한 전력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제조 업체와 협력한다” 며 “여기서 테슬라와 포드가 만든 전기차, 테슬라 배터리월, 미쓰비시 히트펌프 등 다양한 기기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라켄을 앞세워 성장한 옥토퍼스의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전문가들은 공기업인 한국전력이 전력 시장을 독점한 구조에서 벗어나, 에너지 전환기에 효율적인 에너지 시장을 구축하려면 옥토퍼스처럼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