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중국 노나라에서 귀족과 무당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난 공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51세에 노나라의 법무 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 자리에 오르고, 55세에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丞相) 대리 직분까지 맡게 된다. 그러나 영광은 짧았고 고난은 길었다. 승상 대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직에서 물러난다. 노나라를 떠나 68세가 될 때까지 긴 세월 자기 뜻을 펼치게 해 줄 제후를 찾아 헤매던, 이른바 주유천하(周遊天下)의 시작이었다.
공자의 주유천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를 헤매는 방황을 연상시킨다. 10여 년이 넘는 세월에 수많은 제자를 이끌고 자신을 등용해 줄 제후를 찾아 끝없이 중원을 헤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공자의 후반부 삶은 신산(辛酸)함을 넘어 애처롭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공자는 늘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몸과 마음을 다잡아 품격을 지키려고 애썼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라는 구절이 나온다. 추운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장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고난과 역경을 겪을 때 제 본색을 드러내는 법이다. 이 구절은 공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한겨울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나 잣나무처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와 도리를 지키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공자의 모습이 눈물겹다. 공자의 이 말은 자고로 지도자는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리더십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공자 사후 2300년이 훨씬 지난 시절,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인 1840년부터 1848년까지 8년간 제주도에 유배된다. 공자의 주유천하에 비견되는 고난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형은 주군안치(州郡安置)였다. 유배된 지역의 행정구역 안에서 자유롭게 통행이 가능했다. 그러나 추사의 유배형은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유배당한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훨씬 가혹한 형벌이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위리안치돼 있던 시절인 1844년, 제자 이상적이 중국 베이징을 다녀오면서 귀한 책을 여러 권 가져와 추사에게 선물을 한 모양이다. 추사는 감격했다. 그는 이상적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준다. 엄동설한에 조그만 초가 앞뒤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다. ‘세한도(歲寒圖)’다. 공자의 말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유배지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에 떨던 추사에게 이상적의 방문은 따뜻한 봄날의 햇볕 같았을 것이다. 그림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 네 글자가 새겨진 추사의 인장이 찍혀 있다. ‘세한송백(歲寒松柏)’ 즉 추위 속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추사 자신의 현실이자, 제자 이상적의 의리였다. ‘세한도’는 고난에 굴하지 않고 이를 이겨내고자 했던 추사의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역전에서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현장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군에게 넘겨져 재판을 받고 랴오닝성 다롄에 있는 여순감옥에 갇혀 있다가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한다.
중국에서 동북 3성은 앞서 말한 헤이룽장성과 랴오닝성 그리고 지린성의 세 개 성을 말한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로도 유명하다. 동북 3성의 하나인 랴오닝성의 여순감옥에 갇혀 있던 안중근의 마음 또한 춥고 외로웠을 것이다. 나라 잃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주적의 하나를 제거했지만, 여전히 조국의 미래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으니, 의사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안중근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사형집행을 앞둔 극한의 상황에서도 안중근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내 한 몸 바쳐서 조국의 독립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역사적 사명감, 송백 같은 강인한 정신력이 그를 끝까지 무너지지 않게 했던 버팀목이었다. 안중근 결기의 클라이맥스는 이미 왼손 약지를 자르는 ‘단지동맹(斷指同盟)’에서 이뤄졌다. 1909년 2월, 의거를 앞두고 러시아 연해주의 한 자작나무 숲에서 안 의사를 비롯한 12명은 암살 결사대를 조직하고, 각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 ‘대한 독립’이라는 글자를 썼던 것이다.
사형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서도에 매진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의 많은 유묵(遺墨) 중에 공자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는 말을 옮겨 쓴 것이 있다. 추사가 당대 최고 명필로서 추사체라는 자신의 서체까지 발명할 만큼 서예가 뛰어났다면, 안중근은 당대 최고의 무인(武人)이요, 의인이었다. 추사만큼 명필은 아니었지만, 무인다운 힘찬 필치와 소박하고 간결한 글씨가 돋보인다.
안중근의 글씨를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논어’ 원문은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인데, 안 의사는 글자를 써 내려가다가 마지막 뒤 후(後)를 빼먹은 모양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후(後) 자 대신에 부(不) 자를 끼워 넣었다. 아닐 부(不) 자를 작은 글씨로 끼워 넣은 흔적이 남아있다. 안 의사의 귀여운(?) 실수인데, 투옥된 입장이라 이미 쓴 글씨를 버리고 새로 쓰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처음에 의사가 원문을 잊어버리고 잠시 착각해서 그랬거니 했다.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혹독한 추위가 온 뒤에야 송백은 뒤늦게 시든다는 공자의 원문을 아예 송백은 시들지 않는다고 바꾼 것은 안 의사 자신의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울컥했다.
고난과 역경은 성장과 배움의 기회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사람의 진정한 성품이 드러난다. 심리학에서는 역경에 처해서 이를 얼마나 잘 극복하는지 보여주는 지표로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를 이용한다. 이 지수는 도전과 난관에 대한 개인의 반응을 평가하는데, 이 지수가 높으면 역경을 성장과 배움의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나는 공자의 말에서, 고난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고, 인간적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소신과 경륜을 정책에 반영하고자 했던 선지자를 본다. 추사의 그림에서, 유배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림 그리기를 통해, 그것을 단순한 창작 활동이 아니라 자아 성찰과 심리적 자기 회복(resilience)의 계기로 삼은 추사의 의연함을 본다. 또한 안중근의 글씨에서는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 직면해 삶의 의미와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실존주의 심리학의 본질을 구현한 멋진 무인을 만난다.
2024년이 저물고 2025년 새해가 밝았다. 국내외 정세는 혼돈하고 세계 경기는 어렵다. 이런 난세(亂世)에 사람이 받을 고통의 종류는 각자 다를지 몰라도 고통의 크기는 2500여 년 전의 공자, 160여 년 전의 추사가 혹은 110여 년 전의 안중근이 받은 그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고난 속에서도 내적인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인간의 궁극적인 척도는 편안과 안락 속에 있을 때가 아니라, 도전과 논쟁의 시기에 어디에 서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이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은 안 의사가 돌아가신 을사년처럼 을씨년스럽지 않고, 새해도 따스한 봄볕 같은 햇살이 가득한 한 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