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해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받았다. 최근 몇 년간 목덜미 통증으로 고생하던 필자는 연주 중에도 불편함을 느껴 주치의의 권유로 검사받게 됐다. 작은 받침대 위에 누워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 갑갑함이 몰려왔다. 기계는 몸을 간신히 수용할 정도로 좁았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간호사는 “30분 안에 금방 끝날 거예요”라고 말했지만, 그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 필자는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과연 어떻게 30분을 버틸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도중, 30분이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두 곡을 읊어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기계 소음과 가빠지는 호흡 때문에 머릿속에 음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음 한 음 떠올리다 보니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이 좁은 공간에서도 음악은 서서히 머릿속에서 형상을 갖춰 나갔다.
머릿속에서의 연주는 현실과는 달랐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음이 머릿속에서는 무한히 길어지고, 음과 음 사이 간격에 손가락의 미세한 동작도 느껴졌다. 손끝이 건반에 닿는 순간이 슬로 모션으로 그려지기까지 했다. 또 감정과 기억이 스며들었다. 토스카나의 노을, 폭풍우가 지나간 아침의 고요 등 다양한 순간이 선명히 떠올랐다.
30분 내내 가슴속을 휘감았던 이 창조적 에너지는 그 좁은 검사 기계 안에서 필자의 마음을 확장하고 자유를 느끼게 했다. MRI 검사를 마치고 연구실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릿속에서 그렸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손끝으로 옮기며 문득 깨달았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그것을 신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인간의 사고와 창조적 힘은 그 어떤 물리적 제약도 초월할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계엄과 자유를 향한 열망
요즘 12·3 비상계엄 사태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다. 계엄포고령 전문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질 때 처음에 필자는 MRI 기계 속에 갇혔을 때의 답답함과 공포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검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공포였다. 우리 일상이 제한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권리가 억압당하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상상하니 곧 답답함은 슬픔으로,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억압이 강할수록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사고의 힘은 더욱 강렬해진다. 이는 역사가 반복해서 증명해 온 사실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억압은 시민의 분노를 자극했고, 이는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향한 열망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열망은 혁명가(歌) ‘라마르세예즈’로 집약됐다.
“비루한 폭군이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된다고! 떨어라! 너희의 패륜적 계획은 마침내 대가를 치르리니! 행진하라, 행진하라!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게 하라!”
라마르세예즈는 단순히 노래를 넘어 시민의 분노와 희망을 담아낸 혁명가였다. 경쾌한 멜로디 속에서도 이 가사는 당시의 참혹한 현실과 시민의 저항 의지를 선명히 담고 있다. 현재 프랑스 국가로 사용되며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이 곡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열망을 그대로 담고 있다.
억압 속 창조의 힘
프랑스의 혁명가인 라마르세예즈의 정신은 후대 음악가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로베르트 슈만은 ‘빈의 사육제’에서 이 멜로디의 일부를 인용했고, 요한 슈트라우스, 엑토르 베를리오즈, 클로드 드뷔시를 비롯해 비틀스 역시 이 곡의 요소를 차용했다.
예술은 억압 속에서도 자유를 잃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에서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검열당했고,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퇴폐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작품을 탄압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예술가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더 깊은 창조적 표현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은 나치의 파리 점령기에 ‘아멘에 의한 환상’ 을 작곡하며 조국의 해방과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이 작품은 지인 몇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은밀히 초연됐지만, 오늘날 전 세계에서 연주되며 메시앙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억압의 시간 속에서 창작된 예술은 현재도 우리와 교감하며 그 가치를 발휘한다. 강한 억압이 있을수록 인간 사고와 창조적 열망은 더욱 강렬해지며, 억압은 종종 자유를 위한 가장 강렬한 동기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를 위한 열망은 멈추지 않는다
현재 우리의 창조적 사고와 표현의 자유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라마르세예즈가 담고 있는 분노와 열망은 오늘날 광화문과 여의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노래하고 외치는 시민의 목소리 속에도 살아 있다. 시민이 부르는 경쾌한 멜로디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갈망과 분노는 숨 쉬고 있다. 라마르세예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