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20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카터 센터에서 암 진단 결과를 언론에  알리고 있다. /EPA연합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20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카터 센터에서 암 진단 결과를 언론에 알리고 있다. /EPA연합

‘평화 해결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별세했다. 향년 100세. 외신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2024년 12월 29일(이하 현지시각) 오후 3시 45분쯤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카터 전 대통령은 암 투병 후 건강 문제를 겪다 2023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 왔다. 그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 1일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 해군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했다. 1953년에 전역했고 고향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땅콩 농장을 운영했다. 그는 대중에게 서민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이 배경을 강조하면서 ‘땅콩 농부(Peanut Farmer)’ ‘미스터 피넛(Mr. Peanut)’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대선 선거운동을 할 때 이용한 비행기 이름은 ‘땅콩 1호기(Peanut One)’였다.

정계에는 1963년 입문했다. 조지아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경쟁자가 부정선거로 낙마하면서 극적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이어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선출됐다. 4년 임기를 마친 후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누르며 현직을 꺾고 제39대 대통령이 됐다. 당시 그는 무명 정치인이었지만,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그의 지지 기반이 됐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해비타트 활동의 일환으로 집짓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UPI연합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해비타트 활동의 일환으로 집짓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UPI연합

세계 평화 기여했지만 ‘무능한 대통령’ 미국 내 비판도

카터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功)으로는 중동 평화 협상 중재가 꼽힌다. 그는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간의 평화 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이 협정은 양국이 수십 년간 이어 온 적대 행위를 종결한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카터 전 대통령이 두 사람을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중재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 협정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도덕주의 외교정책과 경제 불황 대처 실패는 그의 과(過)로 꼽힌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78년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노선은 ‘공정함’”이라면서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겼다. 이는 남미에서 미국이 제국주의 국가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기여했지만, 미국 내에선 카터 전 대통령이 국익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1979년 11월엔 이란에서 대학생들이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 등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1980년 4월 특수부대를 투입해 구출을 시도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철수 과정에서 미국 항공기 충돌 사고로 군인 8명이 숨지면서, 카터 전 대통령이 자국민 안전마저 지켜내지 못했다는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당시 붙잡힌 인질은 차기 대통령이 취임한 1981년 1월이 돼서야 풀려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해 2차 오일 쇼크까지 발발하면서 미국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발생했고, 카터 전 대통령은 이에 대처하는 데 실패해 지지율이 추락했다. 그는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공화당 후보에게 크게 패하면서, 역대 대통령 중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인물이 됐다.

노벨 평화상 수상…퇴임 후 더 빛났던 대통령

“한 번도 부유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이 없다”던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인권·평화 수호 활동에 전념했다. 재임 당시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전직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는 1982년 고향 조지아주에서 비영리단체 ‘카터 센터’를 설립해 분쟁 종식, 민주주의 실천, 인권 보호, 질병 및 기아 퇴치 등에 기여했다. 90세가 넘도록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을 오가며 반전 운동에 기여했다. 그는 “전쟁은 항상 악이고, 절대로 선이 될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 놓인 사람을 돕는 자원 단체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 짓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와 그의 부인 로잘린의 손길이 닿은 집은 무려 14개국 4400채에 이른다. 그는 2001년 충남 아산에서 사랑의 집 짓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기니벌레 박멸 운동을 펼쳐 이를 사실상 박멸하는 공을 세웠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6월 16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이 만나고 있다. /카터 센터
1994년 6월 16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이 만나고 있다. /카터 센터

한국과 주한 미군 철수 대립, 북한과 평화 협정 물꼬

카터 전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를 두고 한국과 대립했다.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한국의 인권 문제를 이유로 들며 3만 명에 이르는 주한 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어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다. 그는 2018년 3월 펴낸 회고록에서 “당시 한국은 경제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충분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가졌던 197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일 것이다”고 회고했다. 

퇴임 후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땐 직접 평양을 찾아 김일성과 만나 북미 협상의 물꼬를 텄다. 남북정상회담도 주선하려 했으나, 그의 평양 방문 직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이후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고메스가 북한에 억류 사건이 발생한 2010년엔 ‘디 엘더스(The Elders)’ 소속 원로 세 명과 함께 북한을 찾기도 했다. 디 엘더스는 넬슨 만델라가 2007년 설립한 전직 국가수반 단체다. 

Plus Point

“ 세계 평화 구축, 인권 증진” 각국 정상 애도 행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각국 수장은 애도를 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나는 삶을 살았다”며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평화를 구축하고, 시민권과 인권을 증진했으며,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촉진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도 “그는 모든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했다.

이웃 나라인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를 비롯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의 찰스 국왕, 키어 스타머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도 그를 추모했다. 우리 정부도 미국에 조문 사절을 파견하기 위해 미국 측과 협의 중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1월 9일 워싱턴 D.C.의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엄수된다. 이후 카터 전 대통령 시신은 군용기 편으로 조지아주 플레인스로 옮겨져 안장된다.

이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