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공중그네’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 그의 작품 중에 ‘시골에서 로큰롤(2015년·은행나무)’이란 에세이가 있다. 1972~75년 일본 기후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로큰롤 마니아로 좌충우돌하던 시골 소년의 분투기를 저자 특유의 간결하고 코믹한 문체로 풀어냈다.
당시 이 책의 추천사를 쓰기 위해 일반 독자보다 먼저 원고를 읽어 내려갔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부러움과 질투가 가슴에서 일렁였다. 2015년의 한국 성인이 1975년의 일본 소년을 부러워한다? 말이 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미 1960년대부터 일본은 영미권 팝 음악의 수혜가 넘쳐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비틀스도 한국은 안 왔지만, 일본은 다녀갔다. 핵심 멤버인 고(故) 존 레넌의 아내가 심지어 일본인(오노 요코)이지 않았나. 1970년대는 해협 하나 차이로 한일의 편차가 서로 다른 대륙만큼이나 컸다. 군사독재 시절이던 한국에서는 가요와 팝송에 대한 사전 검열이 극심했고, 제대로 된 해외 음반 하나 구하기 힘들었다. 당대 한국의 소년과 청년 음악 마니아에게는 라디오에서 이따금 나오는 빌보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받아 적고 암기하는 ‘간접 체험’이 가장 강렬한 음악적 경험이었다.
반면 일본은 어떤가. 몇 장의 음반 제목만 들어도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1970년대 전 세계 하드록 최강의 라이브 명반을 꼽는다고 치자. 아마 지구촌 록 마니아 열 중 아홉은 이 음반 먼저 후보에 올리고 볼 것이다. 영국 밴드 딥 퍼플의 1972년 명작 ‘Made in Japan’. ‘Highway Star’나 ‘Smoke on the Water’ 같은 명곡의 펄펄 끓는 명연이 그득한 앨범이다. ‘Made in Japan’이란 제목은 레코드판을 감싸는 종이나 기타 부재료의 조립 등을 일본 생산 라인에 맡겼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일본에서 만든’ 라이브 명반이란 말이다. 1972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도쿄의 부도칸, 오사카의 페스티벌 홀에서 펼친 실황이다. 여러모로 놀랍다. 첫째, 당대 최고의 록 밴드가 일본을 찾아 복수의 도시에서 공연을 연 것. 둘째, 딥 퍼플에 걸맞은 음향과 녹음 시스템을 갖춘 것. 딥 퍼플은 당시 ‘월드 투어’를 돌았다. 수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연주했지만 ‘결정판’은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시골에서 로큰롤’의 저자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용광로 한가운데 있었다. 본인은 기후현에 살았기에 ‘내일(日) 공연’의 수혜를 듬뿍 받는 도쿄와 오사카가 부러웠다는 ‘설’을 에세이에서 풀지만 나는 그런 그가 읽는 내내 부러웠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서 ‘벡, 보거트 & 어피스(명 기타리스트 제프 벡이 이끈 3인조)’의 전성기 공연을 두 눈으로 ‘직관’할 수 있었던 그다.
내한 공연 2023년 160건→2024년 389건 ‘급증’
2015년, 40년 전의 일본 소년을 부러워하던 나 같은 한국 성인은 이제 그런 질투에 무감해졌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세기 일본과 같은 상황이 바로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회에 소개했던 미국의 정상급 힙합 아티스트 카녜이 웨스트를 보라. 수도 서울도 아닌 경기 고양시에서 연 공연이 인터넷을 타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올해 라인업도 화려하다. 4월에 콜드플레이가 무려 6회 공연을 고양시에서 연다. 10월엔그 자리에 재결합한 브릿팝 제왕 오아시스가 온다. 근년에 우리는 빌리 아일리시, 올리비아 로드리고, 두아 리파 같은 미국과 영국의현재진행형 최고 팝스타의 내한 공연을 모두 ‘안방’에서 볼 수 있었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을 분석해 봤다. 2024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5일간 대중음악 내한 공연은 총 389건 개최됐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내한 공연이 열린 셈이다. 총티켓 판매액만 643억여원에 달한다. 건수로 보면 2023년의 160건에 비해 두 배를 훌쩍 넘는 수치. 금액으로 봐도 2023년 약 431억원에서 많이 증가했다.
서울 쏠림 현상도 덜해지고 있다. 내한 공연 건수를 보면, 서울이 여전히 127건(2023년)과 268건(2024년)으로 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경기·인천이 2023년 7건에서 2024년에 48건으로, 경상도(부산 포함)는 11건에서 47건으로 크게 뛰었다.
해외 팝스타의 ‘서울 러시’는 왜 이어지는 걸까. 기본적으로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 선전과 홍보에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 음악 그룹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대변하는 K컬처 붐 속에서 세계인은 한국과 서울을 첨단을 달리는 힙스터 문화 지대로 인식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신비의 땅 ‘지팡구’로 불리며 서구인이 동경하던, 극동아시아의 대표적 문화 수도인 일본의 이미지가 21세기 들어 한국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것도 한몫했다. 2010년대 후반부터 한국은 서구권 기업인의 아시아 출장지 선호도에서 최상위권으로 올라섰다. ‘일본에 가겠냐, 한국에 가겠냐’고 했을 때 ‘한국이 너무 궁금하다’고 답하는 임직원이 많다는 이야기는 이제 글로벌 기업을 상대하는 이들이라면 흔히 듣는 풍문이다.
소셜 파워도 한몫한다. 이는 영화계에서 먼저 증명됐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의 프랜차이즈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서울을 전 세계 최초 개봉 도시로 앞다퉈 잡은 것이다. 2024년 7월에는 물 콘셉트 음악 축제인 ‘워터밤 서울’ 무대에 할리우드 톱스타 라이언 레이놀즈와 휴 잭맨이 물총을 들고 올랐다. ‘데드풀과 울버린’ 홍보를 위해서였다. 영화 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저들이 한국 시장에 들이는 공이 이 정도다.
음악 시장은 소셜 파워가 영화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곳이다. 숏폼 바이럴 플랫폼 ‘틱톡’이 TV, 라디오를 제치고 새로운 히트곡 제조장으로 떠오른 것은 이제 1, 2년 사이 이야기가 아니다. 카녜이 웨스트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한국에서 2시간 30여 분간 77곡을 메들리로 쏟아내고 이 공연의 전체 영상을 통째로 자신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 괜히 업로드한 것이 아니다. 한국과 서울은 동아시아 공연 시장의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가까운 일본, 중국뿐 아니라 태국,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음악 팬이 수시로 찾는 ‘핫 플레이스’ 다. 배경에는 K팝 붐이 있다.
2023년 12월 인천 영종도에 1만5000석 규모로 문을 연 ‘인스파이어 아레나’는 이런 흐름을 꿰뚫은 기획이다. 인천국제공항에 인접하고 호텔·리조트 시설까지 연계한 곳이다. 이곳은 국내 인기 가수와 아이돌 그룹은 물론이고 머룬5, 린킨 파크, 요아소비 등의 대형 내한 공연으로 개장한 지 불과 1년 만에 객석을 숨 가쁘게 채워갔다. 2025년 1월 11~12일 예정된 일본 아이돌 그룹 나니와단시의 공연은 ‘아시아 공연 허브’론(論)을 잘 뒷받침한다. 마니아층을 제외하면 국내 인지도는 낮은 이 그룹의 인천 콘서트는 음악 시장에서도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일본 자국 관객과 아시아권 관객이 몰린 것으로 전해진다. 비행기 타고 와서 공연도 보고 ‘힙한’ 한국 관광, 나아가 K팝 관광도 이어갈 용의가 얼마든지 있는 이들이다.
카녜이 웨스트를 유치하고 콜드플레이, 오아시스까지 잡은 고양시도 인천국제공항과 접근성, 서울과 인접성을 동시에 내세우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2024년 12월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연 ‘2024 고양문화예술정책포럼’은 그 부제가 ‘글로벌 공연 거점 도시를 향한 고양시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자리에서 “미래에 (고양시에 공연을) 가장 유치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누구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동환 고양특례시장은 “방탄소년단의 제대 기념 공연을 유치하고 싶다”고 답했다.
서울, 인천, 고양…. 한국 음악 팬이 뉴욕을, 런던을, 도쿄를 마냥 동경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글로벌 공연 허브’를 노리는 싸움은 국내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