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선거에서 내가 최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젠 리셋(reset·초기화)할 때다.”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 캐나다 총리가 1월 6일(이하 현지시각) 수도 오타와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2015년 11월부터 9년 넘게 캐나다를 이끌어왔지만,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감염병 대유행) 후 불거진 고물가, 집값 상승, 이민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고관세 부과 방침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일자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취임 당시 44세라는 젊은 나이와 세련된 이미지로 전 세계 진보 정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트뤼도는 어쩌다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결정을 내린 것일까.
트뤼도 지지율, 70%→17% 추락
트뤼도는 캐나다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 피에르 트뤼도의 장남으로 2008년 퀘벡주 몬트리올의 파피노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첫발을 들였다. 정치 경력은 짧았지만, 2013년 자유당 대표로 선출됐고 2015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총리 자리에 올랐다.
취임 당시만 해도 트뤼도 지지율은 70%에 육박했다. 호감형 외모에 수려한 언변을 앞세우며 남녀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소수자 권리 옹호, 난민 적극 수용 같은 진보 정책을 적극 펼쳐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때부터 지지율이 하락세로 전환했다. 캐나다 경제가 코로나19발(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특히 극심한 공급 부족이 촉발한 부동산 가격 상승은 국민 불만을 크게 키웠다. 실제로 캐나다부동산협회(CREA)에 따르면, 2020년 1월 53만7000캐나다달러(약 5억4550만원)였던 캐나다 평균 주택 가격은 2022년 1월 81만캐나다달러(약 8억2280만달러)까지 50% 이상 치솟았다.
전향적인 이민정책도 트뤼도 지지율의 발목을 잡았다. 애초 트뤼도는 매년 50만 명의 신규 이민자를 수용해 캐나다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캐나다 이민청에 따르면, 트뤼도 집권 첫해인 2015년 28만5000명이었던 신규 영주권 발급 목표치는 2024년 48만5000명까지 70% 늘어났다. 문제는 이민자 급증으로 나타난 부메랑 효과였다. 주요 도시 집값과 실업률이 뛰고, 공공 의료 서비스 질이 하락하면서 국민 불만이 누적됐다. 결국 2024년 10월 트뤼도는 연간 신규 영주권 발급 목표치를 단계적으로 낮추겠다고 밝히며 이민정책 방향을 선회했지만, 이미 등 돌린 민심을 되돌리긴 어려웠다.
결정타는 트럼프였다. 취임 첫날 모든 캐나다·멕시코 제품에 25% 추가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한 트럼프를 설득하러 트뤼도는 2024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까지 날아갔다. 하지만 트럼프로부터 돌아온 건 ‘캐나다 주(州)지사’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야 한다’ 등의 조롱이었다. 2024년 크리스마스 때도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트뤼도에게 “캐나다가 우리의 51번째 주가 된다면 세금은 60% 이상 줄고, 기업은 규모가 두 배가 될 것이며,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군사적으로 보호받을 것” 이라고 도발했다. 트뤼도가 트럼프의 관세 압박 대응에 실패했다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2024년 12월 기준 그의 지지율은 17%대까지 추락했다. 이는 제1 야당인 보수당 대표 지지율(40.0%)에 23%포인트가량 뒤처진 수준이었다. 자유당 내에서도 사임 압박이 높아지자, 결국 트뤼도는 사임을 결정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사임은 당내에서 몇 주 동안 사퇴 압력을 받은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취임 앞두고 사임⋯ 리더십 공백 우려
트뤼도의 사임 결정은 1월 20일 트럼프 2기 정부의 출범을 불과 2주 앞두고 이뤄진 일이다. 다만 트뤼도는 새로운 자유당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3월 24일까지 캐나다 의회를 정회시켰다. 그사이 집권 자유당이 새로운 당 대표를 선출하면 대표직과 총리직을 이양하겠다는 계획이다.
의원내각제인 캐나다에선 집권당 대표가 총리직을 수행한다. 애초 야당에서는 자유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조기 선거를 시행할 계획이었다. 만약 자유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선거는 예정대로 10월 말, 야당의 불신임 투표안이 가결되면 선거는 앞당겨질 수 있다.
문제는 이때까지 캐나다의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윌슨센터 캐나다 연구소의 자비에르 델가도 연구원은 “트뤼도 사임으로 인해 캐나다가 미국의 공격적인 정책에 더 취약해졌다”며 “보통은 미국 대통령 임기 첫 100일에 상대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게 효과적인데, 레임덕 상태에 빠진 트뤼도가 이 중 상당 기간 정부를 이끌게 되면서 대응력을 더욱 약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NYT에 따르면, 현재까지 당 대표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유당 내 차기 신임 대표 및 총리 후보로 트뤼도 행정부 전현직 장관 등이 거론되는 분위기다. 우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전 부총리 겸 재무 장관이 출마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2024년 12월 트럼프의 고율 관세 협박에 대한 트뤼도 대응이 ‘지나치게 저자세’라고 비판하며 전격 사퇴한 인물이다. 트럼프 1기 정부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후속 협상을 주도한 바 있다. 도미닉 르블랑 신임 재무 장관도 거론된다. 트뤼도 총리의 오랜 고향 친구로, 트럼프 취임 직후 트뤼도와 함께 마러라고로 날아가 트럼프 팀을 만난 캐나다 대표단이기도 했다.
만약 조기 총선이 실시돼 정권이 교체될경우, 캐나다 제1 야당 보수당의 대표 피에르 폴리에브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총리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폴리에브가 트뤼도를 한참 앞선 바 있다. 폴리에브는 ‘우파 포퓰리스트’로 통한다. 그는 트뤼도의 지난 9년간 정책이 캐나다를 망가뜨렸다고 주장하며, 여당의 친이민정책과 기후변화 대응 정책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인물이다.
트럼프 집권 앞뒀는데… 美 우방국 정치 혼란 가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