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 감독의 2005년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연말연시 정서와 잘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영화는 눈보라 치는 겨울 도시를 배경으로,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아끼며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펴가는 찰리 가족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캐럴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음악과 알록달록한 색감 그리고 초콜릿의 매혹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져 관객에게 소박하면서도 달콤한 설렘을 선사한다.
초콜릿의 천재 장인, 윌리 웡카는 자신의 초콜릿 공장을 방문할 다섯 명의 아이를 선발한다. 전 세계의 어린이와 부모가 황금 티켓이 든 웡카 초콜릿 바를 찾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가난한 찰리는 매년 생일에만 초콜릿을 맛볼 수 있을 만큼 궁핍한 형편이다. 부모가 생일을 앞당겨 초콜릿을 선물하지만, 티켓을 발견하지 못한 찰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다잡고, 가족과 함께 초콜릿을 나누며 미소 짓는다. 애틋한 마음으로 손주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비상금을 털어 두 번째 초콜릿을 사주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초콜릿 공장의 초청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찰리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눈 덮인 거리를 걷던 찰리는 우연히 길가에 떨어진 지폐를 발견하고, 가까운 상점으로 달려가 마지막 초콜릿을 구입한다. 초콜릿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기는 찰리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이 뒤섞인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번째 황금 티켓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차가운 벽 너머의 초콜릿 세계
웡카의 공장은 행운의 주인공을 맞이하기에 지나치게 스산하고 무표정한 모습이다. 들쑥날쑥한 톱니 모양의 지붕과 불규칙하게 솟은 굴뚝은 오랜 세월 멈춰 선 거대한 기계의 잔해처럼 보인다. 어두운 석재가 쌓인 공장의 외벽은 빈틈 하나 없이 견고하며, 냉랭한 분위기로 주변을 압도한다.
그러나 초콜릿 향을 가둔 채 닫혀 있던 작은 밀폐문이 열리는 순간, 차갑고 건조한 외관과는 전혀 다른 초콜릿의 세계가 펼쳐진다. 윤기를 머금은 초콜릿 강이 유유히 흐르고, 초콜릿 폭포가 넓은 초콜릿 강을 휘저으며 깊은 풍미와 질감을 더한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초록 언덕은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풀로 덮여 있고, 형형색색의 초콜릿, 젤리, 마시멜로로 빚어진 열매와 꽃이 그 위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각 방에서는 독특한 초콜릿 제조 과정이 펼쳐지며, 동그라미와 회오리 같은 부드러운 곡선의 실내장식과 집기가 사탕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광택을 발산한다.
초콜릿을 경험하는 건축
서로 대비되는 공장의 외부와 내부를 점진적으로 경험하는 찰리의 여정은 실제 초콜릿을 맛보는 과정과 유사하다. 빳빳한 포장지와 은박지를 천천히 벗겨내면 차갑고 어두운 갈색 덩어리가 드러난다. 한 조각을 베어 물면 각진 표면이 단단하게 느껴지지만, 이내 서서히 녹아내리며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달콤함과 씁쓸함이 어우러진 카카오의 깊은 풍미는 단순히 미각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어린 시절의 꿈, 행복한 기억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초콜릿 공장처럼, 현실에서도 초콜릿을 위한 건축물이 있다. 그러나 이를 설계하는 건축가는 먹을 수 있는 영화 세트처럼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상상이 아닌, 실제적인 구축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주변 맥락과의 관계, 재료의 물성과 형태, 공간 구조의 체계를 정교하게 조율해 완성된 결과물은 합리성과 기능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초콜릿이라는 소재가 가진 감각적 풍부함은 이러한 건축적 틀을 자연스럽게 허문다. 초콜릿 특유의 매력과 상징성이 공간의 질서와 어우러지면서, 건축물은 건축가의 의도를 넘어 영화 속 웡카의 세계처럼 무한한 상상과 해석의 장으로 유연하게 흘러들어간다.
역사적인 공장 캠퍼스에 놓인 초콜릿 박스
린트 앤드 슈프링글리(Lindt & Sprüngli)는 1845년에 설립된 스위스의 대표적인 초콜릿 제조 업체로, 취리히 호수 인근에 본사를 두고 있다. 본사 캠퍼스에는 100년 이상 초콜릿 생산과 유통의 중심이 되어 온 공장, 창고, 사무실 건물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다. 2020년에는 이 역사적인 캠퍼스의 새로운 관문 역할을 하는 ‘린트 초콜릿의 집’이 문을 열었다. 이 건축물은 초콜릿 애호가에게 초콜릿 생산과정과 미래의 레시피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 및 전시 공간을 제공하며, 브랜드의 전통과 혁신을 아우르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설계를 맡은 스위스 건축가 크리스트 앤드 간텐바인(Christ & Gantenbein)은 기존 산업 시설의 맥락을 반영해 절제된 박스 형태의 건축물을 디자인했다. 전통적인 공장이나 창고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사각형 외관은 붉은 벽돌로 마감되었으며, 벽돌의 줄눈까지 동일한 색상으로 처리돼 하나의 추상적인 덩어리로 읽힌다. 창문이 거의 없는 폐쇄적인 외벽은 건물의 하중을 구조적으로 지지하고, 한쪽 모서리는 원형으로 움푹 들어가 전면의 공공 광장을 위한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
이처럼 주변과 관계에서 도출된 기능적인 박스는 초콜릿의 감각과 중첩될 때 새로운 상상을 이끈다. 유광 백색 벽돌로 덮인 모서리의 원형 벽은 붉은 벽보다 높이 솟아 두께를 드러내며, 둥글게 말린 초콜릿 포장지를 연상시킨다. 곡선 벽 하부에 수평으로 길게 열린 입구는 이 벽이 구조가 아닌 장식적 외피임을 암시한다. 정교하게 배열된 황금 글자는 입구로 들어서는 방문자에게 초콜릿 포장지를 여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에서, 원형 벽 너머의 붉은 박스는 차갑고 견고한 초콜릿 덩어리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내부 공간에 녹아든 달콤한 시간
박스의 내부 공간은 세 개의 층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거대한 아트리움으로 구성된다. 상부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은 아트리움을 극적으로 채우며, 견고한 외관과 대조를 이루는 빛의 환경을 조성한다. 각 층은 외벽과 더불어 엘리베이터, 설비, 나선형 계단을 품은 둥근 기둥으로 지지되며, 바닥부터 천장까지 원형 요소가 엇갈려 겹치는 장면을 연출한다. 아트리움의 형식은 용도의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밝은 콘크리트로 구축된 원형 구조는 박스 외관의 벽돌과 대비되는 재료의 물성을 부각한다.
린트 초콜릿의 집 내부는 백색 톤으로, 웡카 공장의 화려한 내부와 대조를 이루지만,아트리움 공간을 리듬감 있게 채운 원형 요소 덕분에 초콜릿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역동성을 지닌다. 역동성은 방문자의 동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방문자는 원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 전시를 관람하고, 생산과정을 관찰한 후 다리를 건너면서 곡선의 공간 사이를 계속해서 이동한다. 이 풍경은 방문자가 초콜릿 생산 공정의 일부처럼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인상을 주며, 입안에 녹아들며 퍼지는 초콜릿의 풍미를 떠올리게 한다.
딱딱한 덩어리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변화하는 초콜릿과 건조한 외관에서 풍부한 내부 공간으로 이끄는 초콜릿의 건축은 시간과 움직임의 개념을 내포한다. 이들은 우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채로 맞이한 새해가 서서히 녹아가며, 향기로운 변화로 다가올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감을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