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알파 전략은 없다. 이 점을 반드시 인지하고 시장 환경에 따라 모델링을 계속 바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쉬는 것도 전략이다. 욕심부리면 탈 난다. 놓을 땐 과감하게 놔야 지키는 투자가 가능해진다. 절대 수익형 펀드를 운용하던 시절에 수익이 잘 나면 환매될 때까지 그 펀드를 그냥 놔두기도 했다.”

2024년 11월 20일 단행된 대신파이낸셜그룹 임원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은 대신자산운용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정만성 대표였다.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프로그래머에서 퀀트(Quant·계량 분석) 애널리스트로, 30대 후반 늦은 나이에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로 수차례 진로를 바꾼 그의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펀드 운용 경험을 중요시하는 자산운용 업계에서 37세 무경험 매니저가 생존할 길은 오직 수익률로 증명하는 방법뿐이었다.

2007년 펀드매니저 명함을 처음 판 그가 대표이사로 승진했다는 건, 지난 17년 동안 늦깎이 핸디캡을 뛰어난 수익률로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정 대표는 1988년 대신자산운용이 설립된 이래 처음 탄생한 내부 출신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늦깎이의 반란’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대신자산운용 본사가 입주한 서울 중구 대신343 빌딩에서 최근 정 대표를 만났다. 정 대표는 절대 수익형 펀드로 플러스(+) 수익률 사수에 성공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시절, 절대 수익형 펀드 시장에서 어렵게 다진 입지를 포기하고 인덱스 펀드로 넘어가 또다시 무명 생활을 시작한 2015년 등을 평생 잊지 못할 도전의 순간으로 꼽았다. 정 대표는 때로 욕심이 생겨도 작은 수익에 만족하고 과감히 멈추기도 했던 절제의 노력이 쌓여 ‘운용 수익률 1위’란 열매를 맺었다고 소개했다.

대신자산운용 설립 이래 내부 출신이 CEO로 임명된 첫 사례다. 어떤 의미일까.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고려한 인사로 이해했다. 대신자산운용에 2007년 입사해 17년 다녔다. 처음 회사에 합류했을 때 퀀트운영본부라는 조직을 꾸리고, 1인 팀인 AI(인공지능)팀을 만들었다. 그때 수탁고가 3억원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3조원을 웃돈다. 그룹에서 이런 성과를 인정해 줬다고 본다. 여태껏 잘해온 부분을 앞으로도 잘하면서 조직에 안정감을 주고, 그 안정감을 바탕 삼아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라는 주문이 아닐까 싶다.”

펀드매니저로서 출발이 늦었다.

“LG그룹 시스템통합(SI) 사업 부문(현 LG CNS)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대신경제연구소 금융공학실로 둥지를 옮기며 여의도 증권가와 인연을 맺었다. ‘금융 공학’ 이나 ‘퀀트’ 같은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수년간 퀀트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다 보니 실제 펀드 운용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마침 대신경제연구소를 이끌던 문홍집 대표가 대신자산운용 대표로 자리를 옮기면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기회를 줬다. 그때가 2007년, 37세였다.”

시작이 늦은 만큼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을 것 같다.

“늦은 나이였지만 부푼 꿈을 안고 자산운용사에 들어와 AI팀을 만들고,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수억원을 모아 펀드 운용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듬해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다. 1900선이던 코스피지수가 1년 만에 800까지 추락했던 걸로 기억한다. 자고 일어나면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잠도 많이 못 잤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금융 위기 덕에 늦깎이 무명 매니저가 업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당시 자산운용 업계의 주류는 리버스 컨버터블 펀드(Reverse Convertible Fund)였다. 만기 시 미리 정해둔 지수 상·하단 사이에 주가가 머물면 약속한 수익률을 돌려주는 상품이었다. 주가연계증권(ELS)을 떠올리면 된다. 대부분 펀드가 -30%를 터치하지 않으면 7~8% 수익을 주고, -30%를 찍으면 고객 수익률도 -30%가 되는 구조였다. 이렇다 보니 지수가 반 토막 나는 상황이 오자 거의 모든 펀드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대신이 내놓은 펀드는 달랐나.

“내가 선보인 펀드는 주류와 다른 절대 수익형이었다. 녹인(Knock in)을 없애 기초 자산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만기 때 조건만 충족하면 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30% 상황에서도, -50% 상황에서도 변동성매매를 계속했다. 결국 2009년으로 넘어오면서 수익률이 전부 플러스로 바뀌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플러스 수익을 낸 거의 유일한 금융 공학 펀드였다.

2009년부터는 지수가 반 토막 나는데도 어떻게 수익을 냈는지 설명해달라는 세미나 요청만 200회 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발표하러 다니면서 시장 인지도를 키워 갈 수 있었다. 이후로 금융 공학 기반 펀드 시장은 대신자산운용의 절대 수익형 상품인 포르테알파가 장악하다시피 했다.”

탄탄한 입지를 쌓았는데, 2015년부터는 코스피 200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 운용으로 갈아탔다.

“절대 수익형 펀드의 한계 때문이었다. 수익률은 높았는데, 그렇다 보니 환매가 자주 발생했다. 당시 법인 투자 담당자는 인센티브를 위해 수익률이 좋은 펀드를 연말에 환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로서는 딜레마였다. 수익률 1등이라고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자꾸 환매하니까 수탁고가 기대만큼 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수익률이 좋으면 자금도 많이 들어오는 펀드를 운용하기로 했다. 인덱스 펀드는 국민연금·사학연금 같은 연기금이 성과가 좋은 상품에 더 많은 자금을 맡긴다.”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 운용에서 후발 주자가 띄울 승부수가 있었는지.

“절대 수익형 펀드에서 사용하던 페어트레이딩(동일 산업의 두 종목을 짝지어 하나는 매수, 다른 하나는 매도하는 것), 롱숏(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주식은 사고 내려갈 것으로 보이는 주식은 팔아 차익을 남기는 것), 아비트라지(arbitrage·차익 거래) 등의 투자 기법을 인덱스 펀드에 적용했다. 대형 경쟁사와 비교해 조직도 작고 판매력도 떨어지니까, 차별화 포인트를 무조건 수익률에 뒀다. 예컨대 자금의 90%는 코스피200 지수를 따르고, 나머지 10%는 절대 수익형 운용 기법으로 굴리는 식이다. 이 10%에서 수익률 10%를 기록하면 인덱스 펀드는 플러스 1%가 된다. 이걸 끊임없이 반복해 전체 수익률을 야금야금 올렸다.”

업계 내 불편한 시선도 있었을 것 같다.

“절대 수익형 펀드를 굴릴 때도, 인덱스 펀드를 운용할 때도 공통적인 반응은 ‘쟤 누구냐’였다. 사람도 낯설고 펀드 콘셉트도 낯설다 보니 그런 시선은 당연했다. 고정관념을깨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인덱스 펀드는 무조건 덩치 큰 놈이 이긴다’ ‘인덱스 펀드는 여러 개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같은 고정관념 말이다. 모두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고 외치는 듯했다. 스스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운용하고 밤에는 모델 짜는 일상을 10년 넘게 반복했다. 임원 되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야근하고 주말에도 일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겨냈고, 보람을 느낀다.”

후배 매니저에게 강조하는 운용 원칙이 있나.

“영원한 알파 전략은 없다. 이 점을 반드시 인지하고 시장 환경에 따라 모델링을 계속 바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쉬는 것도 전략이다. 욕심부리면 탈 난다. 놓을 땐 과감하게 놔야 지키는 투자가 가능해진다. 내 경험을 예로 들면, 절대 수익형 펀드를 운용하던 시절에 수익이 잘 나면 환매될 때까지 그 펀드를 그냥 놔두기도 했다. 펀드가 총 20개라고 치자. 아침에 출근해서 수익률을 조회한다. 무난한 펀드는 그냥 두고 가장 안 좋은 서너 개를 잡아서 온종일 그것만 매매하는 것이다. 인덱스 펀드도 그런 식으로 했다.” 

전준범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