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목(가운데) 대통령 권한대행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월 1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중경(왼쪽) 국제투자협력 대사, 최종구 국제금융협력 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 기획재정부
최상목(가운데) 대통령 권한대행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월 1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중경(왼쪽) 국제투자협력 대사, 최종구 국제금융협력 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 기획재정부

정부가 비상계엄과 탄핵 등으로 불거진 대외 경제 불안을 수습하기 위해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 관료 출신인 최종구(행시 25회)전(前) 금융위원장과 최중경(행시 22회)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국제 협력 대사로 임명했다. 이들을 임명한 최상목(행시 29회) 대통령 권한대행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까지, ‘3최(崔)’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강만수 전 기재부(전 재정경제부) 장관 밑에서 위기를 극복하며 손발을 맞춘 이른바 ‘강만수 보이스(boys)’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 주역

최 권한대행은 1월 10일 최 전 금융위원장을 국제금융협력대사로, 최 전 장관을 국제투자협력대사로 각각 임명했다. 국제투자협력대사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임명하는 ‘대외직명대사’다. 정부 대표 혹은 특별 사절 자격으로 1년 임기로 활동한다. 다만 신분은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이다. 임명권자인 최 권한대행을 포함한 세 사람은 모두 기재부 관료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가에서는 세 사람의 17년 전 인연이 회자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로, 강 전 장관이 이명박 정부 초대 기재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당시 최중경 대사는 기재부 1차관, 최종구 대사는 기재부 국제금융국장이었다. 최 권한대행은 정책보좌관·비서실장으로 강 전 장관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었다. 국제금융국은 1차관 산하에 있고, 1차관을 지휘하는 장관 옆에는 비서실장이 있었으니, 이 셋은 당시 금융 위기를 함께 헤쳐나갔던 산증인인 셈이다.

강만수, 최중경, 최종구 세 사람은 환율을 다루는 ‘외환 당국’ 라인업으로 불렸다. 강 전 장관은 2008년 초 당시 경상수지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환율이 과도하게 절상(원·달러 환율 하락)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판단하고, 환율을 ‘정상화(원·달러 환율 상승)’해 수출을 늘리고자 했다. 1997년 환율의 과도한 절상으로 경상수지가 악화해 외환 위기를 당했다는 교훈을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이었다. 이른바 ‘환율 주권론’이다.

하지만 2008년 여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리먼 브러더스 파산 등으로 확산하며 상황은 급변했고, 이번엔 원·달러 환율의 가파른 상승이 문제가 됐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정부는 적극적으로 환율에 개입했다. 거래가 한산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급작스레 달러 매도 물량을 대량 쏟아내 ‘도시락 폭탄 작전’이란 별칭도 붙었다. 이를 진두지휘한 인물은 최종구 당시 국제금융국장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강 전 장관의 저서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에도 등장한다. 최중경 대사에 대해선 “경상수지를 흑자로 반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험로였다. 언론과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계속해 고환율 정책과 시장 개입을 비난했고, 물가 상승의 주범을 원유 가격이 아니라 환율로 몰아갔다”라며 “나와 함께 고군분투하던 대외 균형 우선론자 최중경 차관을 7월 7일 눈물로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라고 썼다.

최종구 대사에 대해선 “조직 운영에서 담당 국장과 과장에게 (장관이) 직접 지시하고 보고받는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중간 단계인 차관과 차관보는 사후에 보고받도록 했다” 라며 “환율과 경상수지는 최 국제금융국장이 직접 내 지시를 받고 움직이도록 했다”고언급했다.

당시 환율 정상화 정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이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의 경우 한국이 비교적 무난하게 넘겼다는 시각도 있다.최 권한대행이 위기관리의 최전선에 있었던 선배 관료의 도움을 받고자, 이들을 낙점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금융 네트워크, 美 공화당 인맥 주목

최종구 대사는 유럽 재정 위기로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했던 2011년에도 환율 안정을 위해 최일선에서 분투한 인물이다. 외환·국제 업무를 관장하는 국제업무관리관(국제차관보)이던 시절, 그는 한일 통화 스와프 규모를 130억달러(약 19조1529억원)에서 700억달러(약 103조1300억원)로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그해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글로벌 금융 안전망(GSM) 논의를 이끌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최종구 대사는 지난해 초 열린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의 대외 조직위원회 대표 위원장을 맡았다. 이번 정부 유일의 메가 스포츠 이벤트였는데, 대회 개최를 비롯해 다양한 부처·지역이 결합된 조직위원회를 하나로 이끌 적임자로서 그가 꼽혔다. 덕분에 한국에서 열린 큰 국제 행사를 무난히 치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중경 대사는 미국 공화당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에서 2012~2015년 3년간 방문연구원 경력이 있다. 덕분에 공화당 인맥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중경 대사는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제목의 저서를 내고 한국의 빈약한 외교 현주소를 꼬집기도 했다. 현재 한미협회 회장도 맡고 있어, 트럼프 2기 정부 네트워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가도 나온다.

앞으로 최종구 대사는 ‘금융’ 분야에서, 최중경 대사는 ‘산업(투자)’ 분야에서 우리나라 대외 신인도 관리를 위해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최종구 대사는 국제금융통(通)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런 이력을 십분 활용해 주요국 정부 관계자와 글로벌 신용평가사, 국제기구 등과 소통할 예정이다. 최중경 대사는 수출·산업 정책을 관장하는 당국 수장을 지냈던 경험을 살려 외국인 투자자 등을 주로 면담하게 된다.

두 사람은 오는 2월 정부가 추진하는 해외 한국경제설명회(IR) 진행자로도 거론된다. ‘비상계엄’이나 ‘탄핵 정국’ 등의 상황에도 한국 경제엔 문제가 없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Plus Point

환율 주권론 주창자 강만수, 등장 때마다 强달러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이 2024년 11월 8일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 문화센터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이 2024년 11월 8일 서울 종로구 생명보험교육 문화센터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환율 주권론은 이명박 정부 첫 경제 수장을 맡았던 강 전 기재부 장관의 ‘정체성’이었다. 환율 관리 정책을 시장에 맡기기보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가 장관으로 취임할 당시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이후 11년 만의 경상수지 적자 위기를 겪고 있었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900원대 초반이었다. 그는 당시 원화의 과도한 절상이 경상수지 적자를 부추기고 있다는 문제 인식을 했고, 원화 가치 약세(고환율)를 촉진해 수출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 개편 전 이름) 차관 시절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확고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위기를 두고 ‘물가 안정을 위해 환율을 방치함으로써 대외 균형을 희생한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때 기억을 반면교사 삼아, 물가 관리를 일정 부분 포기하더라도 성장 동력인 경상수지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지론을 갖게 된 것이다.

강 전 장관은 한국 경제사의 위기마다 경제 관료로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엮어 최근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도전실록’을 펴냈다. 이 책에도 역시나 환율 주권론에 대한 그의 소신과 정책 집행 과정 그리고 여러 비난에 직면했던 기억 등이 담겨 있다. 그는 지난해 여름 신간 출판 기념 북콘서트를 연이어 개최해 모처럼 관료 후배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재집권부터 종합부동산세·상속세·부가가치세 등 조세정책, 전 국민 지원금까지 다양한 경제 현안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오늘날에도 환율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글로벌 강달러에 더해 비상계엄 사태, 탄핵 정국 등 불안정한 국내 상황까지 겹쳐, 2024년 말엔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강 전 장관 자신이 경제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즈음인 2009년 3월 이후 15년 9개월 만에 쓴 기록이다.

박소정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