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 중 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인지도가 상당해 와인을 고를 때 그의 평점을 참고하는 애호가가 많다. 지난 연말 서클링 측으로부터 의외의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가 와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와인 이름은 ‘미래’. 무려 한글 이름이다. 평론가가 와인을 만든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그는 어떤 연유로 한글 이름의 와인을 만들게 된 걸까. 한국을 방문한 서클링을 만나 직접 물어보았다.
제임스 서클링, 수십 년 경력의 와인 평론가
서클링은 미국 태생으로 와인 전문 기자와 평론가로 수십 년간 경력을 쌓았다. 세계적인 와인 미디어인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에서 유럽 지국장으로 일할 때 보르도와 토스카나 등 유명 산지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이 빛을 발한 바 있다. 현재 그는 제임스서클링닷컴(JamesSuckling.com)을 운영하며 매년 수천 종에 달하는 와인의 시음 노트와 점수를 발표하고 있다. 해마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개최하는 ‘그레이트 와인즈 오브 더 월드’는 서클링 점수 90점 이상을 받은 와인을 한자리에 모아 시음하는 행사로 우리나라에서도 와인 애호가가 손꼽아 기다리는 이벤트다.
서클링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더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한국인 아내 마리 김(Marie Kim·이하 마리)의 역할도 크다. 와인 업계에서 일하다 만난 두 사람은 제임스서클링닷컴을 함께 경영하고 있다. 이번에 출시한 와인의 이름을 미래로 정한 것도 마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서클링이 미래를 만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2022년 그가 10년 만에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북섬 최남단에 있는 마틴버러(Martinborough) 지역을 차로 지나다 포도밭을 매각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1만8000㎡의 작은 밭이지만 1988년에 식재된 피노 누아(Pinot Noir)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기억을 되새겨 보니 과거에 자신이 다녀갔던 곳 아닌가. 그는 강한 끌림을 느꼈고 이 밭의 포도라면 훌륭한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바로 떠오른 사람이 아내였다. 과연 동의해 줄까. “갑자기 휴대폰으로 포도밭 사진이 전송됐다. 한 번도 그런 사진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 밭을 마주하고 얼마나 크게 감동했으면 이럴까 싶었다. 그래서 동의했다. 단 융자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포도밭 매입에 찬성했을 때를 회상하며 마리가 해준 이야기다.
서클링은 평소 뉴질랜드 피노 누아에 기대가 많았다. 뉴질랜드의 서늘한 해양성기후에서 자란 피노 누아는 맛이 신선하고 경쾌하다. 그가 1980년대에 파리에서 일할 때 마시던 부르고뉴(Bourgogne) 피노 누아를 연상시킨다. 최근 프랑스는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으며 피노 누아의 맛이 변하고 있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고 보디감도 묵직해지면서 시라(Syrah)를 닮아간다. 하지만 뉴질랜드는 전 세계에서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곳. 그는 이곳에서 “피노 누아 본연의 맛을 찾았고 미래를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매입한 밭은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땅에 돌이 많아 물 빠짐이 좋고 일조량도 풍부하니이곳의 피노 누아는 풍성한 아로마를 보여줄 것임이 틀림없었다.

뉴질랜드 피노 누아에 한글을 아로새기다
와인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뉴질랜드에는 한국인 와인 메이커가 없다. 뉴질랜드를 통틀어 포도밭 주인 중에 한국인은 마리가 유일하다. 그래서 뭔가 한국적인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 서클링과 마리의 아이디어였다. 마틴버러는 녹음이 우거진 곳이니 레이블을 초록색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다 인연이 닿은 사람이 강병인 작가였다. 그의 글씨는 ‘미생’ ‘참이슬’ ‘아침햇살’ ‘산사춘’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미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강 작가가 집 근처를 산책했을 때 일이다. 우연히 땅에 떨어진 포도나무 가지를 발견했는데 이걸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지를 먹에 찍어 쓴 것이 지금 레이블을 장식하고 있는 글씨다. 가늘지만 강인한 필체가 포도나무 가지와 닮았고 피노 누아의 정교한 맛과도 상당히 잘 어울린다.

미래 2023년산은 서클링과 마리가 출시한 첫 빈티지다. 그해는 비가 많이 온 탓에 작황이 좋지 않아 잘 익은 포도만 골라서 만드느라 생산량이 1600병에 그쳤다. 대신 서늘했던 날씨 덕분에 와인에는 피노 누아의 산뜻함과 우아함이 잘 살아 있다. 오크 향이 행여 피노 누아의 섬세한 풍미를 가릴까 봐 서클링은 와인을 숙성할 때도 여러 번 사용한 중고 배럴을 이용하는 등 세심함을 더했다. 이 와인은 현재 한국과 홍콩에서만 판매 중이다. 2024년은 기온이 더 높았고 비도 덜 와서 최고의 빈티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생산량도 3000병 정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필자가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와인 평론가로서 자신의 와인을 어떻게 평가할 계획인지 궁금했다. 서클링은 미래가 전 세계 와인 중 유일하게 자신이 점수를 매기지 못하는 와인이 될 거라고 했다. 그래야 다른 와인을 평가할 때 공정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만들면서 와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앞으로는 시음할 때마다 그 와인을 만든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미래 포도밭은 더 건강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현재 유기농으로 전환 중이다. 그의 와인과 함께 그의 평론도 미래에는 더 진솔하고 깊은 내용을 담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