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 있는 공자 사당./사진 셔터스톡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공자 사당./사진 셔터스톡

‘논어’의 위정편 4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독립했고,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 일흔 살에는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 所欲不踰矩).” 

워낙 유명해서 ‘논어’를 통독한 적이 없는 사람이어도 상식처럼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공자는 ‘나는 몇 살에 이랬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말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전적 회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후세 학자 중에 공자의 이 말을 보편적 법칙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의 발달단계 이론의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공자의 인생 단계별 회고를 발달단계 이론처럼 해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공자는 왜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志學)’고 했을까.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닌가.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그의 아버지 공흘과 어머니 안씨 사이에 야합(野合)을 통해 난 아들이다. 안씨는 무당으로, 낮은 계층의 여인이라 공흘과 안씨의 관계는 정상적인 혼인 관계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첩의 아들을 서자(庶子)라고 하고, 천첩 그러니까 노비 등과 사이에서 난 아들을 얼자(孼子)라고 했다. 서자와 얼자를 합해 서얼이라고 했으며, 서얼은 양반이 될 수 없는 중인 계급이었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말하면 공자는 서자도 아니고 얼자였던 것이다.

세 살 때 아버지 공흘이 죽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공자는 열다섯 살 때 어머니 안씨가 세상을 떠나자, 부모의 합장을 시도해 성공한다. 아버지 공흘 집안에서 인정해 준 것이다. 평민 이하의 낮은 계층에서 소귀족의 계급을 획득한 것이다. 조선시대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춘추시대에는 계급 간 이동이 다소 융통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평민 계급과 귀족 계급이 배우고 익혀야 할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 말년에 공자는 자신의 ‘나이 열다섯쯤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한 것이다. 그럼 ‘서른에 이립(而立)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후세 학자들은 저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를 추어올리면서 다양한 해석을 한다. 

귀족 계급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권을 쥐고 있는 대귀족 집안에서 하급 관리일을 전전하던 공자는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지 못했다. 공자는 15년이 지나 서른이 돼서야 제대로 된 사설 학원을 세워 귀족 계급의 자제를 포함한 제자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가족을 부양할 만큼 경제적인 독립을 하게 된다. 이립의 설 립(立) 자는 ‘경제적으로 홀로 섰다’는 뜻인 것이다.

공자는 ‘나이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다(不惑)’고 했다. 이 역시 공자의 나이가 정확히 마흔이 돼서 어떤 일에 미혹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막 경제적인 독립을 하고 살 만해진 공자. 공자는 서른네 살 때 제법 유명한 귀족인 맹희자의 눈에 들어 그의 아들 맹의자와 남궁경숙의 스승이 된다. 그리고 지금의 자가용에 해당하는 전차와 운전기사인 어자(御者)까지 제공받는다.

그런데 그가 서른다섯이 됐을 때 공자가 살던 노나라에서 내전이 발생한다. 당시 노나라는 삼환(三桓)이라 불리는 3대 귀족 가문이 연합해 강력한 힘을 갖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제후인 노소공(魯昭公)은 힘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참다못한 노소공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100년 넘게 노나라를 쥐락펴락해 온 실권자 삼환을 당할 수 없었다. 노소공은 결국 ‘내란 수괴’로 몰려 제나라로 망명한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힘이 없으면 임금이 군사를 일으켜도 내란이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공자의 고민은 깊었다. 실권자 삼환에게 줄을 설 것인가, 힘없이 패퇴한 국군(國君) 노소공을 따를 것인가. 기본적으로 공자는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의 소신을 갖고 있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노소공을 따라 제나라로 갔다. 공자는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김진국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공자의 선택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었다.앞으로의 정치적 비전은 물론, 자기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노소공은 끝내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제나라에서 객사했다. 공자 나이 마흔둘에 있었던 일이다. 공자는 마흔이 되던 해에 노소공의 망명정부를 뒤로하고 노나라로 이미 귀국한 뒤였다. 이때 이렇게 내전을 경험하고 목숨까지 거는 도박을 했던 엄청남 경험이 그로 하여금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불혹(不惑)의 자세를 갖게 한 것 같다.

공자는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고 했다. 공자는 쉰 살이 됐을 때 노나라 수도 곡부의 시장 정도에 해당하는 중도재(中都宰)의 관직에 오른다. 이어서 쉰하나에 법무 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고, 쉰다섯에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丞相) 대리 자리까지 오른다. 평민 지위였던 공자가 드디어 노나라 최상층부에까지 진입한 것이다. 공자가 쉰에 천명을 알았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서 세상과 자연을 아우르는 이치, 즉 천명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50대 초반 몇 년은 공자 인생의 짧은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쉰다섯에 실권자인 삼환에 의해 하루아침에 실각한 공자는 예순여덟에 다시 노나라로 귀국할 때까지 13년간 자신을 중용해 줄 군주를 찾아 헤맨다. 이른바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결과는 참담했다. 그를 써줄 군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공자를 두고 세상 사람은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며 조롱했다. 공자는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공자가 말년에 ‘나이 예순에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耳順)’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나이 일흔에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 일흔셋에 세상을 뜬 공자는 일흔에 사랑하는 아들 공리(孔鲤)를 잃고, 수제자인 안회(顔回)마저 떠나보낸다. 공자가 사망하던 해에는 역시 사랑하던 제자 자로(子路)마저 내전 중에 사망한다. 친아들과 애제자까지 떠나보낸 70대 노인에게 어떤 세속적 욕망이 남아있었겠는가. 세상사에 초연해져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시기마다 겪어야 할 성찰과 성숙 과정

‘논어’ 위정편 4장의 말을 융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사회적 기대에 맞춰 자기 역할을 학습하는 것이 지학(志學)이고, 자아(ego)를 확립하고 사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은 이립(而立)이다.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혼란을 극복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불혹이고,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 깨닫는 것이 지천명이다. 세상의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그것과 자기 내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순이며, 자아가 무의식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더 이상 외부 규율에 의해 억제되지 않는 것이 종심소욕불유구라 할 수 있다.

발달단계 이론에서는 어떤 단계가 늦게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건너뛸 수는 없다. 이와 달리 공자의 인생 단계는 단순히 나이별로 딱 정해져 있는 목표가 아니다. 시기마다 인간이 겪어야 할 중요한 성찰과 성숙 과정을 공자가 자기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제시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논어’ 위정편의 말이 삶의 소명을 발견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교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자유를 추구하는 멋진 여정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기를 소망한다. 

김진국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