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 무효 및 체포 집행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 사진 뉴스1
1월 13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 무효 및 체포 집행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 / 사진 뉴스1

망국의 적은 안팎에 있다. 내부의 적으로는 우선 권력 찬탈 등의 목적으로 내란을 획책하는 무리를 들 수 있다. 또 탐욕으로 딴 뜻을 품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때가 되면 나라와 주군을 배반해 창을 반대로 겨누거나(倒戈) 기꺼이 간첩이 되기도 한다. 전자는 눈에 잘 띄어 금방 발각되지만, 후자는 보이지 않아 더 무섭다. “보이는 데서 찔러오는 창은 피하기 쉬우나, 몰래 쏘는 화살은 막기 어렵다(明槍易躱, 暗箭難防)”는 말 그대로다.

전국시대 말기 조(趙)의 곽개(郭開)는 적국의 뇌물을 받고 간첩이 되어 당대의 두 명장을 해침으로써 나라를 멸망케 한 원흉이다. 진(秦)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조왕은 타국에 있던 염파(廉頗)를 불러오려고 사신을 보냈다. 곽개는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도록 사주했다. 염파는 객지에서 울분 끝에 죽었다. 진이 다시 곽개에게 대장군 이목(李牧)을 내란죄로 모함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결국 이목이 병권을 박탈당하자, 대군은 궤멸하고 나라는 멸망했다.

진시황(秦始皇)의 전국 통일 이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나라 안에 간첩이 있다는 정보기관의 보고가 올라왔다. 잡고 보니 이웃 나라 한(韓)에서 보낸 치수(治水) 전문가였다. 외국 간첩이 국가의 기간(基幹)산업을 담당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진시황은 국외에서 들어온 자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초(楚)에서 온 이사(李斯)가 ‘간축객서(諫逐客書)’로 이를 철회하라고 간청했다. 결국 전면적인 추방령은 철회됐지만, 외국인에 대한 엄격한 신원 검증과 철저한 감시 감독은 국가의 중대사가 됐다.

세상에는 매우 놀랄 만한 일도 자주 접하다 보면 평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간첩 사건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중국 사람은 ‘사공견관(司空見慣)’이니 ‘습이위상(習以爲常)’이라고 한다. 자주 보아서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 장의 긴 둑도 개미구멍에 무너지고, 백 자 넓은 집도 연통 틈 연기로 불탄다(千丈之隄以螻蟻之穴潰, 百尺之室以突隙之煙焚)”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비자(韓非子)’의 ‘유로(喻老)’ 편에 있는 경구(警句)다.

북송(北宋) 말기의 악비(岳飛·1103~1142) 또한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결국 적국과 내통한 거물 간첩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불세출의 충신 명장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거물 간첩은 중국 역사상 제일의 간신으로 꼽히는 진회(秦檜·1091~1155)다.

악비는 일찍부터 여러 전장을 누비며 위용을 떨쳤다. 정강(靖康) 2년(1127) 휘종(徽宗)과 그 아들 흠종(欽宗)이 금(金)에 잡혀간 뒤로는 유수한 장수의 일원으로 최전선에서 적과 싸웠다. 어느 날 누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잠긴 그는 ‘만강홍(滿江紅)’이란 곡조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노한 머리카락 갓을 찌르고, 난간 기댄 곳에 부슬부슬 비 그친다. 하늘 우러러 길게 소리치니, 웅장한 가슴 뜨겁게 출렁이도다. 흙먼지 속에 이룬 서른 살의 공명, 구름과 달빛 아래서 지나온 팔천 리 길. 허투루 세월 보내지 말지니, 젊은이 머리 희어진 뒤에는 헛되이 슬픔만 가득하다네(怒髮衝冠, 憑欄處, 瀟瀟雨歇. 擡望眼, 仰天長嘯, 壯懷激烈. 三十功名塵與土, 八千里路雲和月. 莫等閑, 白了少年頭, 空悲切). 정강 때의 치욕을 아직 씻지 못해, 신하의 한이 언제나 사라지려나? 긴 수레 몰아 짓이기리니, 저 하란산의 모퉁이를. 씩씩한 뜻 배고프면 오랑캐 고기 씹고, 웃고 떠들며 흉노의 피를 마시리. 처음 그대로 옛 산하를 다시 거둘 때, 천자의 궁궐 향하리라(靖康恥, 猶未雪. 臣子恨, 何時滅. 駕長車踏破, 賀蘭山缺. 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飲匈奴血. 待從頭, 收拾舊山河, 朝天闕).”

북방의 적과 대치하던 변방을 당시(唐詩)에서는 흔히 ‘음산(陰山)’이라 하였듯이 송의 시가에서는 ‘하란산’을 많이 썼다. 이 작품이 명대에 발견됐기 때문에 악비의 원작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풍격과 수사적으로 보아 악비의 작품이 맞다. 그의 다른 시가에도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씩씩한 기상 당당히 북두성을 꿰뚫고, 곧은 절의로 군주의 원수를 갚으리(雄氣堂堂貫斗牛, 誓將直節報君仇)”라거나 “길게 말달려 황하를 건너고, 곧장 연과 유의 땅으로 쳐들어가리니(長驅渡河洛, 直搗向燕幽)”라거나 “산하를 수복한 날에는 이 한 몸 던져도 달게 여기리(恢復山河日, 捐軀分亦甘)”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이처럼 피 끓는 결의로 분전한 결과 옛 도성 변경(汴京) 부근까지 진격했다. 감개무량한 그는 휘하 장수에게 말했다. “적의 심장 황룡부로 곧장 달려가 그대들과 통쾌하게 마시리라(直抵黃龍府, 與諸君痛飮爾).” 이를 보고 적진에서는 “산은 흔들기 쉬워도 악비군은 흔들기 어려워(撼山易, 撼岳家軍難)”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때 회군하라는 어명이 전해졌다. 조정에서 하루 만에 열두 차례나 금자패(金字牌)를 보내 악비를 소환했다. 악비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십 년 쌓은 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구나(十年之力, 廢於一旦)!” 회군한 지 몇 달도 안 돼 그는 내란 수괴로 몰려 처형됐다. 모든 일을 적국의 지령을 받은 진회가 획책했다.

진회는 두 황제가 북쪽으로 끌려갈 때 함께 잡혀갔다. 오래지 않아 그는 아내 왕씨(王氏)와 하인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왔다. 남쪽 조정에서 의심하자 그는 감시하던 군사를 죽이고 탈출한 뒤 수천 리를 달려왔다고 둘러댔다.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으나 그와 친한 무리는 그의 말이 틀림없다고 편들었다. 그와 함께 잡혀갔던 손부(孫傅)나 장숙야(張叔夜) 등 대신은 모두 북쪽에서 순국했다.

북송 멸망 전까지 진회는 오늘날의 언론기관 같은 역할을 하는 간관(諫官)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제법 정의롭고 충직한 말을 곧잘 했다. 금에 대해서는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사람이 완전히 변하고 논조도 바뀌었다. 앞장서서 적과의 화친을 부르짖었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그는 점차 중용되면서 반대파에게 여러 죄목을 씌워 하나하나 탄핵해 조정에서 내쫓았다. 18년 동안 권력을 독점하면서 나라를 망쳤다. 북쪽 조정과는 화친조약을 맺고 해마다 엄청난 조공을 바쳤다.

악비를 해칠 때에는 여러 간교한 수단을 동원했다. 우선 감찰관 묵기설(万俟卨)로 하여금 내란 음모죄로 악비를 탄핵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악비보다 군의 상급자인 장준(張俊)과 짜고 왕준(王俊) 등 악비의 수하 여럿을 잡아 매수와 협박으로 위증하도록 했다. 악비가 옥에 갇히자, 장군 한세충(韓世忠)이 악비에게 무슨 죄가 있냐고 따졌다. 진회가 “막수유(莫須有)”라고 대답했다. ‘있겠지’라는 뜻이다. 이에 한세충이 “세상 사람이 납득할 수 있겠나”라고 소리쳤다.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 부근에는 악비의 사당인 악왕묘(岳王廟)가 있고 그 안에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는 진회 부부 등 네 사람이 옷을 벗고 꿇어앉아 있는 철상(鐵像)이 배치돼 있다. 출입문에는 다음의 대련(對聯)이 새겨져 있다. “푸른 산은 운이 좋아 충신의 뼈를 묻고, 흰 쇠는 억울하게 간신 모습 되어 있네(靑山有幸埋忠骨, 白鐵無辜鑄佞臣).”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한비자는 ‘망징(亡徵)’ 편에서 망국의 여러 징조를 열거한 뒤,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반드시 좀을 통해서이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을 통해서다(木之折也必通蠹, 牆之壞也必通隙)”라고 정리한다. 이어서 “그러나 나무가 비록 좀먹어도 세찬 바람이 없으면 부러지지 않고, 담장에 비록 틈이 생겨도 큰비가 없으면 무너지지 않는다(然木雖蠹無疾風不折, 牆雖隙無大雨不壞)”라며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찬 바람과 큰비가 몰아치고 있지 않은가.

풍전등화의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 분에 맞지 않는 권력과 이득과 영달을 탐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와 배반자와 역도(逆徒)가 제 세상 만난 듯 발호(跋扈)한다. 온갖 음모와 궤계(詭計)와 사술(邪術)로 도행역시(倒行逆施)의 무법천지가 됐다. 설마 망하기야 하겠느냐고 남의 일 보듯 하는 이도 적지 않지만, 그 때문에 뒤늦게 땅을 치게 된다. 

불과 얼마 전의 역사가 증명한다.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가 가련하다. 초야의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오늘도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며 비탄할 뿐이다. 엄동설한을 겪고 난 뒤에는 곧 따뜻한 봄볕을 쬘 수 있듯이 나라도 그렇게 되기를 빈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