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스틸컷. /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월-E 스틸컷. /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 낭비지만, 좋건 나쁘건 현재로서는 지구만이 우리 삶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우주가 아무리 넓고 아름다운 무한의 공간이라고 해도, 달과 화성 이주를 계획한다 해도 인간이 발붙이고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행성은 지구가 유일하다. 그런데 만약, 지구가 생명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인류는 지구를 떠나 초호화 거대 여객선 엑시엄호를 타고 벌써 700년째 우주를 떠돌고 있다. 무심히 쓰고 버린 결과 쓰레기 산이 되어버린 지구에서는 더 이상 발 디딜 곳도, 숨 쉴 공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쓰레기에 파묻힌 지구를 수만 대의 청소 로봇에게 맡기고 5년 예정으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한 번 파괴된 환경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우주선은 최고의 편의와 복지를 제공했고 인류는 떠돌이 삶에 완전히 적응했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안락의자에 누워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생활 서비스를 받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걸음마도 못 하는 아이처럼, 하루 종일 누워 먹고 자고 놀며 시간을 소비하느라 초고도 비만형의 게으른 생명체가 되었다. 인류가 크루즈 우주여행을 즐기며 삶의 진실한 의미를 잃어가는 동안, 황톳빛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버린  지구를 지켜온 것은 청소 로봇 월-E였다. 큐브처럼 생긴 네모난 몸통에 망원경 같은 착한 눈을 가진 그는 동료 로봇들이 고장 나고 녹이 슬고 고철이 되어 모두 사라져 버린 것과 달리 용케도 혼자 살아남아 인간이 부여한 임무, 지구 청소에 여념이 없다. 인간이 쌓아둔 쓰레기 산은 치워도 치워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싫증도 날 것 같은데 월-E는 불평하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에서 오늘은 어떤 신기한 물건을 발견할까, 자기만의 보물을 찾아내려는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고된 작업도 즐겁기만 하다. 다만, 이렇게 모아놓은 보물을 함께 나누고 기뻐할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일하게 살아남은 바퀴벌레 한 마리 말고는 친구가 없는 그의 마음에는 외로움이 조금씩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초록색 잎을 가진 여린 식물 한 뿌리를 발견한다. 생명은 로봇의 눈에도 예쁘고 귀해 보였을까.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월-E는 새로운 보물이라 여겨 집에 가져가기로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하늘에서 거대한 우주선이 날아와 작고 예쁜 로봇을 내려놓고 간 것이다. 지구에 다시 생명이 거주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엑시엄호가 보낸 탐사 로봇 이브였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있지만 천국을 모른다면 지옥의 고통도 일상일 뿐, 월-E는 처음으로 천국을 본다. 세련된 외모와 까칠한 성격의 이브에게 한눈에 반한다. 일과를 마치고 즐겨보던 뮤지컬 영화 주인공처럼 그에게도 손잡고 싶은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둘의 만남을 축하하듯 흘러나오는 샹송처럼, 월-E의 ‘장밋빛 인생’이 시작될 것만 같다.

월-E 스틸컷. /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월-E 스틸컷. /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공작새가 깃털을 뽐내며 춤추듯, 사랑이란 상대 앞에서 더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가진 것을 다 주더라도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 소망이다. 마침, 모래 폭풍이 불자 이브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온 월-E는 그간 모은 수집품을 마음껏 자랑한다. 쓸모를 알지 못했던 사물이 이브의 손에서 존재 이유를 되찾는다. 헝클어져 있던 큐브는 한순간에 맞춰지고 전구는 밝아지고 라이터는 불이 켜진다. 

상대가 열어 보인 경이로운 세상으로 발을 딛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이브도 월-E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까? 자신의 이름을 ‘이바’라고 발음하는,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는 촌스러운 로봇이 내미는 것마다 시큰둥해하던 이브는 푸른 식물을 본 순간, 냉큼 받아 가슴에 품는다. 그러고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고 매우 좋아 까무러친 연인처럼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월-E는 영문을 몰라 당혹스럽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발을 구르며 흔들어 깨워도 눈을 뜨지 않는다. 우주선이 돌아와 이브를 데려가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도, 정붙이고 살아온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는 것도 두렵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위험도 상관없었다. 월-E는 이브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되찾기 위해 몰래 우주선에 오른다.

“더 이상 빈둥대고 살기는 싫어. 난 제대로 살고 싶다고.” 

엑시엄호의 선장은 이브가 가져온 희망의 싹을 보자 인류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인공지능(AI) 로봇 오토가 반대한다. 그의 임무는 우주선을 안전하게 운항하는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가면 그의 역할과 쓸모는 사라진다. 어쩌면 실질적인 선장이 되어 인간 위에 영원히 군림하고 싶은 차가운 야망이 자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소 로봇 월-E에게 따뜻한 마음과 자아가 생긴 것처럼. 

오토가 선상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된 월-E와 이브는 선장을 도와 인류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안타까웠던 잠깐의 이별은 서로의 의미를 깨닫게 했고, 위기는 두 마음을 하나로 포개 손을 맞잡게 했다. 월-E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던지고, 이브도 진실한 그의 마음을 믿고 위험을 헤쳐 나간다.

월-E는 ‘이바’ 하고 이름을 부른다. 이브도 ‘월리’ 하고 소리쳐 부른다. 그들의 대화는 진심을 담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다. 마음이 통해 손잡을 수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러고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언어를 낭비한다. 나를 이해해달라고, 당신은 왜 그러냐며 소음을 남발한다. 그 결과 가까이 있는데도 사랑을 전하지 못한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이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인다면, 월-E와 이브가 두 손 꼭 잡고 우주로 날아가 행복한 왈츠를 추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주여행이 가능해지더라도 지구는 인류가 지켜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비록 거짓과 탐욕, 전쟁과 기아가 인류의 삶을 끊임없이 괴롭힐지라도 생명과 사랑이 있어 우주의 한 귀퉁이, 작은 행성은 오늘도 푸르게 빛난다. 

김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