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뉴스1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뉴스1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만났다. 이는 이 회장이 법원에서 부당 합병, 분식 회계 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첫 행보로, 10년 가까이 삼성을 옭아맨 사법 리스크 해소 후 ‘뉴 삼성’ 구축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업계에 따르면, 세 사람은 2월 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분야 기술 협력을 논의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오픈AI, 소프트뱅크, 오라클의 창업자들이 발표한 합작 프로젝트 ‘스타게이트’와 관련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타게이트는 5000억달러(약 737조7000억원) 규모의 AI 인프라 프로젝트로, 미국 전역에 초거대 AI 데이터센터 등을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오픈AI와 소프트뱅크가 기술과 투자를 담당하고, 오라클이 데이터·클라우드, 엔비디아가 AI 가속기, Arm이 반도체 설계를 맡는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인 1월 21일(이하 현지시각) 미 백악관에서 발표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손 회장은 이 회장을 만난 뒤 취재진에 “스타게이트 진행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매우 좋은 논의를 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밝혔다.

AI 개발·반도체 설계·제품화…삼위일체 이룰까

삼성전자와 오픈AI, 소프트뱅크그룹은 AI 생태계에서 각자 뚜렷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AI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오픈AI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생성 AI(Generative AI) 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2022년 11월 내놓은 ‘챗GPT’로 돌풍을 일으켰다. 2024년 9월 선보인 추론이 가능한 AI 모델 ‘o1(오원)’은 인간과 유사한 인공 일반 지능(AGI)에 가장 가까운 모델로 평가받는다. 손 회장은 테크 업계의 큰손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기업인 영국 Arm의 지분 90%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회동에는 르네 하스 Arm CEO도 배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은 세계 최대 메모리 생산 업체로,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중앙처리장치(CPU) 등을 생산하고, 파운드리도 보유하고 있다. AI 기술을 적용할 제품(가전·스마트폰)도 생산한다. 현재 삼성 제품에는 구글의 AI가 쓰이지만, 오픈AI 모델을 탑재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외연 확장의 길이 열린 이 회장은 오는 3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도 만날 것으로 점쳐진다. 3월 17~2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엔비디아가 주최하는 ‘GTC 2025’에 참석할 가능성이 나오면서다. GTC는 세계 최대 AI 개발자 콘퍼런스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이 행사에 참가해 HBM 제품을 선보였다.

100차 공판 끝에 사법 리스크 해소

세 사람의 ‘AI 회동’은 그간 삼성을 옭아맸던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약 10년 만에 해소된 직후 이뤄졌다. 앞서 이 회장과 삼성 전현직 임원 등 13명은 2월 3일 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에 관여하는 등 총 19개 혐의를 받았다. 이 회장을 불구속 기소한 검찰은 징역 5년,벌금 5억원을 구형했으나 1심에 이어 2심 재판부도 이 회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기한 혐의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추측만으로는 피고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봤다.

사건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비롯했다. 이 회장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물려받아 그룹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이 추진한 부정 거래와 시세조종에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전자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지분을 확보해야 했는데,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4%를 가져오기 위해 자신이 대주주(지분 23.2%)로 있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했으며, 합병 비용을 낮추기 위해 이 회장과 미전실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 주가를 낮추고 제일모직 주가를 띄웠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이 합병 목적과 경위, 효과 등을 허위로 공시했으며, 결과적으로 삼성물산 주주에게 손해를 입혔다고도 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시세를 조종했다고 판단할 만큼 비정상적인 거래 행태가 관찰되지 않았다고 봤다. 미전실이 이 회장에게 유리한 합병 비율과 시점을 선택해 삼성물산 주주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주장에 대해선 “미전실의 사전 검토는 확정적이라고 보기 어렵고, 이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통상적이고 적법한 대응 방안”이라고 했다. 양 사 합병으로 삼성물산 주주에게 재산상 손해를 끼친 혐의와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에 관여한 혐의에 대해서도 법원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실적 부진 속 컨트롤타워 재건…이재용 리더십 시험대

이 회장은 지난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이후 국정 농단 사태, 부당 합병 사건까지 약 10년 동안 반복된 검찰 조사, 560일간의 수감 생활 그리고 100차례가 넘는 공판을 거쳤다. 이 회장은 그룹 총수로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 법원 판단을 받고 있어 경영 활동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공판에 참석하느라 장기간 해외 출장을 떠나기도 어려웠다.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삼성의 전례 없는 실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가장 시급한 건 주력 사업인 반도체다. 경쟁사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납품에 성공하는 등 HBM 시장을 선점해 사상 최대 실적을 이어가고 있는 동안 삼성전자는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한 채 납품마저 지연되고 있다. 그 결과 삼성전자의 2024년 반도체 사업 영업이익은 15조1000억원으로 SK하이닉스(23조4673억원)를 한참 밑돌았다. 가전과 스마트폰을 포함한 2024년 4분기 전체 영업이익은 6조4927억원으로 SK하이닉스(8조828억원)에 처음으로 추월당했다. 

파운드리 사업도 수조원대 적자를 내고 있고, 지난해 첫 노조 파업으로 이어졌던 노사 갈등도 아직 봉합되지 않았다. 여기에 트럼프 정부의 고관세정책과 반도체 보조금 지급 중단 가능성 등 대외 리스크도 더해졌다.

이번 무죄 선고로 이 회장이 경영 활동에 전념하고 외연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 과감한 투자와 혁신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이 회장이 무죄 판결을 받은 다음 날인 2월 4일 삼성전자 주가는 전날 대비 3.33% 오른 5만2700원에 거래를 마쳤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는 0.10% 오른 것과 대비됐다. 

이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