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무니사가 푼도 로스 니초스 공동 대표가 피스코 증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프란시스코 무니사가 푼도 로스 니초스 공동 대표가 피스코 증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피스코는 달빛이 녹아든 물방울, 안데스 차가운 공기를 담은 크리스털 잔 속의 영혼.’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생전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조국 칠레를 한 술에 빗댔다. 피스코(Pisco)라는 술이다. 그가 창조한 시상(詩想)에서 피스코는 그저 술이 아니다. 칠레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우리나라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소주 입지에 가깝다.

그는 이 술을 묘사할 때 주로 세 가지 상징을 사용했다. 달빛과 별 같은 천체, 안데스산맥과 대지, 수정이나 물방울 같은 투명함. 모두 칠레 자연과 문화, 민족정신을 응축한 은유적 장치다.

칠레 코킴보 피스코 증류소 ‘카핀차스’에서 피스코 완제품을 포장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칠레 코킴보 피스코 증류소 ‘카핀차스’에서 피스코 완제품을 포장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장인 정신, 전통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전략

네루다 작품에 등장하는 칠레 북중부 엘키 밸리(계곡) 포도밭. 안데스산맥 서쪽에서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엘키강 발원지인 해발고도 1200m, 쨍한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골짜기 사이사이 구름이 낀 안데스산맥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뤘다. 맑은 하늘 아래 가지런히 뻗은 포도나무가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오래된 포도밭 한쪽 100년이 넘은 포도나무 고목이 잔뜩 뒤틀린 모습으로 간신히 서 있었다. 그 사이로 현지 농부들이 포도송이를 다듬고 가지를 쳤다. 

“여러분 옆으로 흐르는 저 물은 안데스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빙하수다.”

엘키 밸리 한 포도밭에서 만난 호세 미겔 비아 수석 양조가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칠레 농림부에 따르면, 1920년대 피스코 전성기에는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를 중심으로 총 280여 개 증류소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산업화 물결과 1973년 쿠데타 이후 급격한 경제 자유화 정책으로 소규모 증류소는 대거 문을 닫았다. 국내 전통 소주 제조 업체가 걸었던 길과 비슷하다.

“대량생산 체제로의 전환 압박, 원재료 가격 상승 그리고 젊은 세대의 기술 계승 포기가 주된 원인이었다.” 칠레 코킴보 지역 피스코 전문가 클라우디아 로페스는 말했다.

현재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를 넘어 칠레 전역에서 피스코를 생산하는 양조장은 85개 정도다. 이 중 연 매출 100만달러(약 15억원)를 넘는 곳은 10개 정도다. 칠레 대기업은 수익성을 이유로 피스코 시장 진출을 꺼린다. 주류 업계에 따르면, 피스코는 평균 영업이익률이 8% 수준이다. 30%에 달하는 맥주, 15~20%인 와인에 비하면 낮다. 칠레주류산업협회 관계자는 “살아남은 증류소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회로 삼았다” 며 “대량생산을 하기보다 장인 정신과 전통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전략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피스코 엘키 밸리 지역 증류소 관계자가 증류 시설을 점검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피스코 엘키 밸리 지역 증류소 관계자가 증류 시설을 점검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강렬한 훈연에서 피어난 달콤한 포도 향

엘키 밸리 로스 니초스(Los Nichos)는 1868년 설립된 칠레 최고(最古) 증류소다. 가장 큰 특징은 200년이 넘은 구리 증류기와 자연 동굴에 마련한 대규모 저장고다.

“우리가 만드는 피스코는 스모키 패러독스(The Smoky Paradox)라 불리는 독특한 향미가 가장 큰 특징이다.” 루이스 데 라 하라 메리노 로스 니초스 공동 대표는 설명했다.

이 증류소는 증류 과정에서 참나무로 증류기를 가열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주류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2023년 평가에서 “처음에는 강렬한 훈연 향이 코를 채우지만, 입안에서는 달콤한 포도 향이 피어나는 독특한 반전이 매력적”이라고 평했다.

연간 생산량은 12만 병에 불과하다. 수백만 병 이상 생산하는 칠레 대규모 와이너리에 비해 적은 양이다. 미국에서 이 브랜드 피스코 평균 판매 가격은 80달러를 넘는다.

반대로 리마리 밸리 카핀차스(Capel)는 여전히 규모를 중요시한다. 카핀차스는 1938년 설립한 협동조합이다. 현재 1200여 포도 농가가 참여해, 규모가 크다. 칠레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이 회사가 만드는 피스코는 연간 생산량 900만L에 달한다. 칠레 피스코 생산량 25%를 차지한다.

카핀차스는 규모가 크지만,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기보다 지속 가능 경영에 힘을 쏟는다. 2023년 기준 증류소 전력 80%를 태양광발전으로 충당했다. 병을 감싸는 패키지도 친환경 방식으로 바꿔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을 50t 이상 줄였다. 경제 전문 매체 ‘포브스’는 카핀차스를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주류 생산자”라고 평가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한 대형 마트 피스코 전문 코너에서 소비자가 피스코를 고르고 있다. /유진우 기자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한 대형 마트 피스코 전문 코너에서 소비자가 피스코를 고르고 있다. /유진우 기자

와카(Wacar)는 과감한 도전으로 주목받는 신생 증류소다. 이 증류소는 설립 이후 ‘제로(0) 첨가 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오로지 머스캣 단일 품종 포도만을 사용한다. 

포도 품종을 하나만 사용하면, 해당 품종의 단점을 숨길 수 없다. 대신 특정 품종이 갖춘 풍미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설립자 피스케로 히메네스는 “현대 소비자는 순수하고 투명한 가치를 중요시한다” 며 “피스코의 본질을 가장 순수하고 과장 없이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 라고 말했다. 주류 전문 매체 ‘와인앤드스피릿’은 2023년, 이 브랜드를 전 세계 최고 증류주 10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국제증류주협회(International Spirits Association)는 2024 증류주 트렌드 리포트에서 “칠레 피스코는 전통과 혁신의 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류주”라며 “수백 년 전통을 지키면서도 지속 가능성과 투명성처럼 현대 소비자가 요구하는 요소에 맞춘 발전을 이뤄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Plus Point

칠레 국민 술 피스코는?

피스코는 명실상부한 칠레 국민 술이다. 한국인이 소주를 모를 수 없듯, 칠레에서 태어났다면, 피스코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기원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가 남미에 포도나무를 들여온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칠레 문화유산위원회 역사학자 후안 카를로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 일대에서는 잉카제국 시대부터 포도로 발효주를 만들었다. 여기에 스페인 정복자가 가져온 증류 기술을 더해 오늘날 피스코가 탄생했다. 피스코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서식하던 새를 케추아어(語)로 부르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칠레에서 피스코는 엄격한 규정에 따라 제조된다. 칠레는 피스코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원산지 보호 명칭 제도를 약 100년 전인 1931년 시작했다.

1940년부터 피스코를 만든 도냐 호세파의 올란도 첼메 대표는 “안데스산맥의 높은 해발고도, 아침저녁으로 습하고 낮에는 건조한 기후, 빙하수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진 곳에서만 제대로 된 피스코를 만들 수 있다”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통성을 가진 지역에서 만드는 술”이라고 말했다.

피스코 제조 과정은 여느 증류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포도를 수확해서 압착한 다음 발효와 증류, 숙성을 거쳐 마지막으로 병에 넣는다. 남다른 것 없는 과정에서 원재료와 증류 기술은 미묘한 차이를 만든다.

칠레 해안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훔볼트해류는 매일 아침, 이 지역에 차갑고 습기 많은 안개를 발생시킨다. 이 안개는 한낮에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면 이내 사라진다. 습하고 서늘한 아침에 포도 열매는 산도를 축적한다. 반대로 건조하고 뜨거운 낮에는 당분을 쌓는다. 두 과정을 반복하면서 포도 열매가 과하게 크지 않아도 강렬한 풍미를 제공한다.

코킴보(칠레)=유진우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