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위기 관리 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 창설자 겸 회장인 이언 브레머(Ian Bremmer)가 12·3 계엄 사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대한 한국의 ‘협상력 열세’ 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2기(2025~ 2028년) 정부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런 정치적 혼란부터 수습해, 안정적인 지도 체제를 바탕으로 미국과 직접 외교를 수행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브레머 회장은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대미(對美) 수입을 늘려 트럼프 정부와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한국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간 한국이 중국 무역의존도를 낮추고 미국 의존도를 높여온 점은 향후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재집권을 줄곧 ‘전 세계적 리스크’ 로 꼽아 온 브레머 회장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 위기가 서로 닮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극심한 정치적 대립, 양당 협력 축소, 국민 불신 심화 등의 모습이 당분간 한국 정치에서 지속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음은 브레머 회장과 일문일답.
유라시아그룹은 올해 최대 리스크로 'G-zero(글로벌 리더 부재로 인한 국제 질서 혼란)'를 꼽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나라인 미국과 중국은 점점 자국 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들의 외교정책은 점점 더 거래적이고 일방주의적이 돼 가고 있다. 국제 협력과 다자주의를 지지하기는커녕, 글로벌 리더십을 제공하길 꺼리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정부하에서 매우 강력하고 공고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의 경찰관’ ‘자유무역의 설계자’ ‘법치주의’ ‘민주주의’ ‘공동의 가치’ 등을 옹호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중국 역시 압도적으로 자국 경제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
G-zero 위협 속에서 국제 협력은 중요한 역할을 할까.
“그렇다. 기후변화와 인공지능(AI) 거버넌스, 안보, 금융 안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제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고, 공동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공동체(community of nations)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하는 일을 감내하는 ‘정글의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first)’, 중국은 ‘차이나 퍼스트(China-first)’다. 그런 와중에 한국·일본·캐나다·독일·프랑스·영국 등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부가 약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나라도 리더십 공백을 메울 수 없는 상황이다.”
G-zero에 따른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3차 세계대전 같은 상황이다. 물론 그런 일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아직은 작다. 하지만 우리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나 냉전 초기와 유사하게 위험한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글로벌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에선 불안정성이 커지고, 분쟁이 많아지며, 경제가 단절된다. 권력 공백 속에선 불량 국가나 범죄 세력이 활개 칠 가능성이 크다. 인류가 겪는 고통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한국에서도 위협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관세와 방위비다. 관세 압박은 어떤 형태로 이뤄질까.
“한국과 일본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상당하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으로부터 관세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완화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선제적 조치의 예로, 한국이 미국산 에너지, 방위산업 제품, 농산물, 조선 관련 장비 등의 수입을 늘리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반대로 혜택을 볼 수도 있을까.
“미·중 관계 악화로 중국산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은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산 첨단 장비에 대한 관세율을 높일 경우, 대체재가 될 수 있는 한국산 전자제품이나 배터리, 기계, 바이오 기술 관련 제품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
방위비 분담 압박도 커질 것 같은데.
“미국은 한국에 관세 압박을 지렛대로 삼아,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체결된 한미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이 미국 측의 초기 압박을 완화할 완충 장치 역할을 당분간 할 수는 있겠다(증액 압박을 지연시키거나 증액 규모를 낮출 근거로 말이다).”
주한 미군 철수나 감축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까.
“미국은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완전히 거부할 정도로 협상이 결렬되거나 대북 협상에서 미국이 북한과 포괄적 합의의 일부로 자국 안보 공약을 일부 축소·재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감축을 고려할 것으로 본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만으로 주한 미군을 감축할 가능성은 작다.”
조바이든 정부에서 한국은 대중 수출을 줄이고 대미 수출을 늘려 왔다.
“한국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있는 점은 워싱턴 입장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대미 수출 증가보다 더 중요한 건 대미 수입을 늘려 트럼프 정부와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간 한국 기업의 대미 수출은 주로 반도체·전기차·배터리 생산을 위한 중간재 공급이 많았다. 이런 미국 내 직접투자(FDI) 확대가 트럼프와 협상에서 한국의 가장 강력한 카드가 될 것이다.”
한·미·일·중 관계는 어떻게 재편될까.
“한·미·일 삼각 공조는 트럼프 정권하에서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생긴 정치적 공백 탓에 더욱 약화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북한과 협상에 나설 경우,한·미·일 협력은 더욱 흔들릴 수 있다. 미국과 동맹국 간 균열은 중국에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중국은 한국·일본에 대한 외교적 접촉을 강화하고 있고, 올해 한·중·일 3국 외교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정치 분열이 극심하다. 미국과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양국 모두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고, 입법은 교착 상태다.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윤 대통령 지지자가 트럼프 지지자의 구호였던 ‘Stop the Steal(부정선거를 막아라)’을 내걸고 집회를 여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 선포를 포함해 광범위한 대통령 면책특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트럼프와 유사한 행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도 극심한 정치적 대립, 양당 간 협력 축소 그리고 지도층에 대한 국민 불신 심화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미국’ 처럼 한국에서도 당분간 헌정 위기가 커질 것이다. 야당 대표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각종 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의 강력한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 진영에선 그를 정당한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수사 요구도 거세질 것이다. 대규모 시위와 정치적 폭력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2.0' 시대에 한국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무엇보다 한국은 현재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게 시급하다. 안정적인 지도 체제를 구축해야만, 트럼프와 직접 외교를 통해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후 한국은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기 위한 선제적 조치를 마련해 트럼프의 관세 압박을 완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최근 몇 년간 미국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바이오 테크 산업에 투자한 수십억달러의 금액과 그로 인해 특히 공화당 강세 지역인 레드 스테이트에서 창출된 일자리를 강조하는 것이 효과적인 협상 카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