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안심하고 귀국할 수 있겠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2월 7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마친 뒤 측근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이시바는 트럼프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이어 두 번째로 선택한 정상회담 상대였다. 이번 회담에서 이시바는 대미 흑자를 줄이기 위해 1조달러(약 1480조원) 상당의 투자를 약속했고, 트럼프에게 아부에 가까운 칭찬 공세를 펼치면서 애초 우려했던 관세 협박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언론도 회담 결과를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전통 우방국까지 관세로 압박하는 상황에서 이시바에겐 ‘함께 황금시대를 열어가자’며 밀착한 배경은 무엇일까. 이번 회담을 앞두고 치밀하게 물밑 준비를 해온 이시바의 노력과 특히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환대)’라고 불리는 일본 특유의 외교술이 통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세 피하고 안보 챙긴 日
미·일 정상회담 결과부터 살펴보자면, 외신은 트럼프의 직접적인 관세 압박을 비롯해 무리한 요구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의 대일본 무역 적자는 685억달러(약 101조원) 규모다. 한국(660억달러)보다도 많다. 이에 이시바는 트럼프에게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확대하고 대미 투자 규모를 1조달러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또 그간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해 왔던 트럼프를 위해 2027년까지 트럼프 1기 정부 시절 대비 방위비를 두 배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도 이번 회담에서 별도로 관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시바가 선제적으로 선물 보따리를 풀면서 트럼프의 무리한 요구를 원천 차단한 모양새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방이자 동맹인 일본을 100% 방어하기 위해 미국의 억지력을 총동원하겠다”는 트럼프 발언을 끌어냈다. 트럼프는 일본과 중국이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가 미·일 안보 조약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해 줬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방침도 재확인했다. 앞서 트럼프는 취임 직후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칭해 미국이 북핵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회담 후에는 양국이 함께 황금시대를 열어가기로 합의했으며, 올해 중 트럼프가 일본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회담 직후 이시바 내각 지지율은 44%를 기록했다. 한 달 전보다 5%포인트 올랐다. 40%대 지지율 진입은 3개월 만이다. 이번 회담에서 일본이 선방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부의 기술' 통했나
첫 미·일 정상회담이 우려와 달리 순탄하게 끝난 데는 오래전부터 회담을 준비해 온 이시바의 노력이 있었다. 이시바는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부터 트럼프 시절 주미 일본 대사 등을 두루 만나 조언을 들었다. 1월 8일에는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2시간 30여 분간 저녁 식사를 하며 개인 과외까지 받았다. 손 회장이 작년 12월 트럼프와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장황한 설명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하자, 이시바는 “내가 가장 서투른 점”이라며 걱정했다고 한다.
회담을 일주일 앞둔 시점부터는 트럼프가 던질 수 있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암기했다. 일본의 대미 투자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도표도 마련했다. 통역은 아베가 트럼프와 만날 때 동행했던 다카오 스나오 외무성 일·미지위협정 실장에게 맡겼다.트럼프도 낯이 익은 인물을 통역으로 배치해 익숙한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회담 당일 이시바는 측근들에게 밝힌 것처럼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회담이 시작하자마자 지난해 7월 트럼프가 유세 도중 총격받은 일을 언급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암살 시도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신이 당신을 구했다.” 회담 직후에도 칭찬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이 ‘트럼프의 첫인상이 어땠냐’고 묻자, “TV에서는 무섭고 강한 성격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매우 진솔한 지도자였다”고 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트럼프가 활짝 웃었다.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면 보복 관세를 부과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가정적인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를 들은 트럼프는 “굉장히 좋은 답변”이라며 흡족해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 빗대 “이시바가 트럼프에게 ‘아부의 기술(the Art of Flattery)’을 구사했다”고 평가했다.
사무라이 투구 선물… 트럼프 손주까지 고려
이시바는 트럼프를 위한 ‘깜짝 선물’도 준비했다. 주문 제작한 황금색 ‘사무라이 투구’ 였다. 이 투구는 작년 11월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308년 역사의 공예점 ‘닌교노하나후사’에 제작 주문을 넣은 것이라고 한다. 금빛을 좋아하는 트럼프 개인 취향에 맞췄다. 또 트럼프에게 어린 손주 10명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어린이도 착용할 수 있도록 가로 57㎝, 세로 81㎝ 크기로 제작했다.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 외교는 사실 이시바의 스타일은 아니다. 이시바는 평소 비대칭적 미·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그는 체면보다 국익을 위한 실리를 택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이시바가 평소 자신의 지론을 펴는 대신 트럼프를 띄워 거리감을 좁혔다”며 “이 같은 판단 덕분에 이번 회담에서 성과를 냈다”고 보도했다.
이번 회담이 진짜로 성공적이었는지는 좀 더 지켜볼 문제다. 트럼프는 3월 12일부터 외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이다. 그간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연간 125만t까지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를 면제해 주는 예외 적용을 받아 왔다. 트럼프가 호주와는 예외 조치를 협의할 가능성을시사한 만큼 일본도 미국과 협상을 노려보겠다는 구상이다. 이시바는 회담 직후인 2월 11일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에서 “일본이 (미국과 사이에서) 문제가 있는 나라와 동일하게 취급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튿날 일본 정부는 미국에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죽은 아베가 이시바 살렸다”
미·일 정상회담 숨은 공신은 아베?

이번 미·일 정상회담 성과를 두고 일본 내에선 2022년 사망한 아베 전 총리 덕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트럼프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베를 언급한 것이다. 회담에 앞서 진행된 모두 발언에선 아베가 암살당한 사건을 언급하며 “아베는 위대한 친구였다. 그렇게 슬펐던 적이 없다”고 애도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이 트럼프에게 ‘이시바를 평가해달라’ 고 물었을 때도 “나는 이시바 총리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아베가 그(이시바)를 매우 존경했다”고 답했다.
그만큼 아베와 트럼프는 각별한 사이였다. 아베는 2016년 11월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뉴욕 트럼프타워로 날아가 금장(金裝) 골프채를 선물했다. 이후 정상회담만 14번, 골프 라운딩만 다섯 번을 가지며 유대 관계를 쌓았다. 서로를 ‘도널드’ ‘신조’라고 편하게 부를 정도였다.
이시바가 이번에 선보였던 오모테나시 외교의 정수를 보여준 인물도 아베였다. 2019년 5월 트럼프의 일본 국빈 방문 중 스모 경기 관람 일정이 있었는데, 양반다리로 방석에 앉는 게 전통이지만, 아베는 트럼프를 위해 별도의 소파를 설치해 그가 편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트럼프와 가장 친한 외국 정상으로 아베를 꼽기도 했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가 요미우리신문에 “아베가 남긴 유산이 이번 회담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전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