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일인 1월 20일(현지시각)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A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일인 1월 20일(현지시각)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A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귀환했다. 4년의 공백은 트럼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취임 첫날부터 무려 26개의 행정명령을 내려, 전임자 조 바이든의 정책을 모두 뒤집었다. 불법 이민자 추방, 범죄 카르텔 척결,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에 따른 소수자 우대 정책 폐지, 불공정 무역 관행 조사, 정부효율부(DOGE) 출범 등 범위도 넓고 결정도 전격적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2기의 1호 행정명령은 ‘해로운 행정명령과 행정 조치의 초기 폐지’로, 바이든 행정부의 행정명령을 단번에 초기화하는 조치였다.

두터운 지지층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이르지 못했던 이유를 트럼프는 배신으로 생각해 왔다. 실제 워싱턴 정가의 수많은 보수 엘리트가 트럼프 정권에 발을 담갔다가 고개를 젓고 물러났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 장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까지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

트럼프는 충성심을 강조하면서 피트 헤그세스의 국방 장관 임명을 강행했고, 털시 개버드를 국가정보국장으로 임명할 예정이다. 과거 미국의 기준에서는 심각한 자격 미달자이지만 트럼프에겐 능력보다 충성심이 중요하다. 이렇듯 더욱 독단적인 성향을 보일 트럼프 2기 정부의 발걸음이 주목되는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이 1기보다 더욱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서울대 법대,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석·박사, 현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 현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서울대 법대,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 석·박사, 현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겸임교수, 현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매킨리의 전통을 찾아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캐나다를 미국에 편입하자는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트럼프의 질 나쁜 농담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린란드와 파나마운하를 미국 영토로 만들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트럼프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가자 지구를 미국이 맡겠다는 등 기존의 상식을 깨부수는 파격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제국주의적 발언이 미국 지도자에게서 나오자 많은 이는 당황했다. 도대체 트럼프의 이런 생각에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미국 제25대 대통령(1897~1901년 재직)인 윌리엄 매킨리다.

매킨리를 이해하려면, 우선 당대를 돌이켜봐야 한다. 19세기 말 미국은 폭발 직전이었다. 겨우 걸음마를 뗀 산업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드는 이민자, 우수한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유럽발 세계화는 미국을 흔들었다. 경제 규모는 기하급수로 증가했고 사회도 하룻밤에 급변했다. 미국의 현대화를 이끌 대통령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던 시기였다.

매킨리는 미국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정치인으로 성장해 왔다.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해 앤티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소령까지 진급했고, 종전 후에는 변호사가 돼 1869년부터 정계에 투신했다. 의원 시절 매킨리는 보호무역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든든한 관세장벽을 세웠고, ‘관세의 제왕’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매킨리의 관세는 경제 활력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공화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18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은 매킨리는 금본위제 도입과 함께 높은 관세장벽으로 번영을 추구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박빙의 승부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영토 확장의 미국 우선주의

매킨리가 여타 미국 대통령과 다른 점은 영토 확장의 의지였다. 매킨리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는 쿠바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1898년 미서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키면서 스페인 해군력을 괴멸시킨 후 1899년 파리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푸에르토리코를 복속하고, 괌과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들 땅에 해군 주요 기지를 설정했다.

또한 매킨리는 미서전쟁 와중에 하와이 복속을 마치고 미국령으로 편입시켰고, 전략적 요충지인 웨이크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제2차 사모아 내전에 개입해 영국과 독일과 함께 삼국 조약을 맺으며 영토를 정리했다. 결과 투투일라섬을 비롯한 사모아제도의 동부를 장악하고 미국 자치령으로 만들었다. 서구 열강이 몰려들던 중국에는 병력 5000여 명을 보내 의화단운동을 진압하면서 미국의 무역 권한을 지켜냈다. 미국을 제국주의 열강으로 만든 게 매킨리였다.

하지만 매킨리는 재선된 후 6개월 만에 암살당했다. 그의 정책은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의해 계승됐다.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는 매킨리의 정책을 이어받아, 파나마운하 지대의 소유권을 얻는 등 영유권 확장을 지속했다. 즉 매킨리 주도로 미국은 어느 때보다 강대한 국가로 성장했다. 트럼프는 이러한 매킨리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고립주의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그동안 트럼프의 대외 정책을 놓고 신(新)고립주의라고 불러왔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명분에 따라 국력을 발휘하며 국제 질서를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자처해 왔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손해 보는 국제 리더 역할보다 국익을 먼저 챙기겠다는 트럼프 모습은분명 국제주의 혹은 윌슨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고립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미국에 고립주의란 단순히 미국에만 갇혀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미국은 이미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면서도 고립주의를 유지해 왔다. 이를 실천해 온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퇴임 고별 연설에서 영구적인 동맹을 피하고 비상시에 잠정적인 동맹을 맺을 것을 권고했다.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평화와 통상에 바탕을 두고 모든 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누구와도 동맹으로 엮이지 않겠다는 유명한 취임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립주의는 먼로독트린에 의해 완성됐다. 1823년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의회 연두 교서에서 유럽과 신대륙의 상호 불가침을 주장했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지 말고 신대륙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지 말 것과 미국은 유럽 보유의 기존 식민지를 포함해 유럽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과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고립주의이기도 하지만, 신대륙 전체에 대한 패권을 미국이 갖겠다는 패권주의적 사상에 바탕을 두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에 비춰보면 매킨리의 대외 정책은 경제적 고립주의이지만, 영토적 팽창주의다. 애초에 매킨리조차도 영토를 늘리기는 했으나 제국주의적인 영토 획득보다는 미국의 상업적 영향력을 펼쳐가기 위한 해군기지 확보가 주목적이었다. 또한 매킨리도 미국의 산업 역량이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지고 수출 경쟁력이 생기면서 보호무역에서 벗어날 필요를 느꼈다.

신고립주의는 미국의 패권 회복 전략

요컨대 트럼프의 신고립주의는 실제 미국이 국제사회와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라기보단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강자로 스스로를 다지기 위해 자국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미국은 이렇듯 관여와 고립의 사이클을 반복해 왔다. 트럼프 이전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는 아시아가 지키라면서 ‘닉슨독트린’으로 대표되는 고립적 성향을 보였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과 독일의 무역 공세에 맞서 플라자합의에 더해 슈퍼 301조 등 무역 장벽으로 대응해 왔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국제 리더십을 떠안고 2001년부터 무려 20년간 대테러 전쟁에 시달린 미국은 분명 회복이 필요하다. 트럼프는 아직 회복하지 않은 미국이 굳이 리더십을 떠안고 희생할 필요가 없고, 이제 회복할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을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한국은 미국의 회복에 어떠한 파트너가 될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흉탄에 쓰러진 아베 전 총리로부터 그런 비책을 넘겨받아 트럼프를 달랬다. 우리 대안은 아직도 명확한 게 없다. 한반도에만 고정됐던 시선을 돌려 전 세계를 봐야 그 대안이 보일 것이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