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정년을 앞둔 모 대학의 교수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1979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올해 정년이에요. 대학에 들어왔을 때도 계엄이었고, 지금 45년 만에 또 계엄이에요. 계엄에서 시작해서 계엄으로 끝난 세대인 거죠.”
이와 반대로 2030세대(이하 2030)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21세기에 무슨 비상계엄이냐고 의아해하는 친구가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죠. 비상계엄은 시대착오적인 ‘계엄령(martial law)’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 시국의 실체를 알게 해준 ‘계몽령(enlightenment law)’이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탄핵 정국으로 몇 달째 온 나라가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고 있다. 처음 놀라고 당황해하던 국민의 반응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 배경을 알게 되면서 극단적으로 양분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처음에는 탄핵 찬성이 압도적이었는데, 연말연시부터 결과가 역전되면서 탄핵 반대 여론이 다수가 됐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2030 젊은 세대에게서 일어났다. 2030 가운데 비상계엄 선포가 꼬일 대로 꼬인 정국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평소 정파적인 소신과 이념에 따라 탄핵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갈리는 기성세대가 볼 때 2030의 이런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계엄령을 계몽령이라고까지 부르는 2030와 달리, 기성세대는 비상계엄에 대해 펄쩍 뛰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런 걸까? 앞서 말한 모 대학교수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정권하에서 실제 계엄령을 경험한 세대는 당시의 폭력적인 억압과 공포, 자유 제한 등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 기억은 집단적인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 있는 사람은 정신적인 상처가 처음 유발됐을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되면,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 등 이른바 침습 증상(intrusion symptoms)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정서적 상처가 재활성화되면, 과거의 상처가 지금의 상처가 된다. 칼에 살짝 베이면 아픔은 크지 않다. 그냥 피가 좀 나고 욱신거릴 뿐이다. 응급조치하고 나면 금세 진통도 된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고 딱지가 앉았을 때가 문제다. 온전히 새살이 돋아나기 전에 상처 딱지를 건드리면 실제 칼에 베이던 순간보다 더 아프다. 트라우마가 재활성화되는 순간의 아픔은 이렇게 상처 딱지를 건드리는 순간의 아픔에 비유될 수 있다. 과거 비상계엄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지금의 계엄령이 결코 대통령이 헌법에 명시된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비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책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계엄령은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의 상징일 뿐이다.

반면 계엄령을 경험한 적이 없는 2030은계엄에 대해 집단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 세대와 달리 특별한 공포와 불안 감정이 없다.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니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는 심리적인 여유가 있다. 따라서 2030은 비상계엄을 과거의 억압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정치적 질서 유지 방안이라고 인식한다. 우리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는 계몽적 성격으로 보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을 보낸 경험 때문에 정부나 권력에 대해 기본적으로 강한 불신을 갖고 있다.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2030은 정부나 권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중립적이다. 계엄령도 경우에 따라서는 실행 가능한 헌법적 조치라는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과 같은 권위주의에 대한 나쁜 경험과 기억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처음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지식인 그룹과 레거시 미디어가 보인 반응을 보고 나는 무척 당혹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가방끈이 길다고 하는 소위 ‘먹물’ 대부분은 입에 거품을 물고 비상계엄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소위 말하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지식인 그룹과 언론을 이끄는 주류가 모두 기성세대라는 점이 관건이었다.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거 기억과 결부된 강렬한 집단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계엄령은 모두 부정적이고 아픈 시대적 기억으로 남아있다. 1961년 5월 16일 당시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인이 정권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소위 10월 유신 체제를 선포했을 때도 그는 계엄령을 발동했다. 1980년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때도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이 활발한 시절에도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워낙 국민적 저항이 거세어 결국 포기했지만 말이다.
“이런 과거의 아픈 경험이 생생히 남아있는데, 60년대나 80년대도 아니고, 21세기에 비상계엄이 무슨 소리야? 미친 거 아냐?” 기성세대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적 능력이 일반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엘리트주의(elitism)를 가지고 있다. 이게 좀 더 발전하면, 자기 이론이 항상 맞다고 생각하는 과신 효과(overcon-fidence effect)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신의 기존 신념을 뒷받침하는 정보나 이론적인 모델도 많아서 그런 선입견을 지지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effect)도 일반인보다 지식인이 갖는 경우가 많다. 현재 한국 상황과도 그다지 맞지 않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33년)의 사례를 들며 12·3 비상계엄을 ‘윤석열의 난’ 혹은 ‘12·3 친위 쿠데타’라고 일갈한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또 다른 대학교수도 있다. 한 세기 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지금의 대한민국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그에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소수 여당 소속의 대통령이 ‘긴급 명령권’을 발동한 것이 결국에는 히틀러 나치 정권을 출범하게 한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에만 집착한다. 그는 여전히 엘리트주의와 과신 효과 그리고 확증 편향에 빠져 같은 맥락에서 인터뷰하거나 기고하고 있다. 소셜미디어(SNS) 특정 정파의 포스팅에 연신 ‘좋아요’를 눌러대기도 한다.
1895년 11월 15일 내각총리 김홍집은 고종의 명령에 따라 관료와 군인을 대상으로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했다. 단발령이란 글자 그대로 상투를 튼 머리를 자르라는 것이다. 단발령은 국가 근대화를 위하여 서양식 개혁을 추진하는 상징적인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조 유생(儒生)에게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불효한 행동이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패륜적인 행위였다. 계엄령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단발령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지금 2030이 12·3 계엄령에 반대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떨까. 아마도 ‘내 머리는 잘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며 극렬하게 저항하던 조선조 유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이 고종 입장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유생에게는 존재 부정이라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계엄 찬반을 놓고 불거진 기성세대와 2030의 괴리가 이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