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증시에 대한 투자자의 굳건한 믿음은 결국 미국 경제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둔다. 미국은 선진국 중 고령화 진행 속도가 가장 느리고 확장적 재정 정책이 수월한 기축통화국이다. 게다가 글로벌 인재가 앞다퉈 모여드는 가운데 에너지자원도 풍부하다. 미국의 자본시장이 세계 각국의 유망 기업을 손쉽게 끌어들이는 건 이 같은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결국 대안은 미국 주식’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물론 불안 요인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 불확실성과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의구심,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 부채와 양극화 심화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경제는 이런 우려를 극복하고 올해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을까. 미 증시 순항의 전제 조건을 점검하고자, 최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를 만났다.
1982년생인 박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학부 시절 그의 지도교수다. 주요 연구 분야는 금융시장과 국제금융, 자본시장과연기금이다.

미국 경제가 올해도 순항할 수 있을까.
“미국 경제의 현재 상황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좋다. 인구 3억3000만 명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8만달러(약 1억1500만원)가 넘는다. 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인데, 이런 거대한 경제가 2024년 2.8% 성장하는 동안 실업률은 4.1%에 그쳤다. 지표만 보면 모든 게 완벽하다. 여기에 달러라는 기축통화가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은 강력한 달러를 활용해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 수 있다.”
미국 경제가 순항할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전망은 조심스럽다. 다만 분명한 건 다른 나라 경제 성과는 미국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주요 20개국(G20) 중 생산과 고용이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전 기대치를 웃도는 국가는 미국이 유일하다. 1990년 미국 GDP는 주요 7개국(G7) GDP의 5분의 2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절반에 달한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미시시피주(州)의 평균임금이 영국·캐나다·독일의 평균임금보다 높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AI 거품론, 국가 부채 부담 등 리스크도 있다.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으로, 중장기 리스크다. 심장마비 같은 급성질환을 우려하는 사람은 없다. 리스크를 상쇄할 요소도 있다. 예컨대 미국은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자 군사 대국이고, 세계 최고 대학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이들 대학은 전 세계 인재를 빨아들인다. 기초과학과 혁신 기술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 선두를 달리는 원동력이다. 이런 환경을 토대로 성장한 미국 자본시장은 우수한 기업을 쉽게 유치한다. 출산율은 1.66명으로, 선진국 중 고령화 속도가 가장 느리다.”
잘생긴 데다 성격도 좋고, 운동까지 잘하는 드라마 속 재벌 2세 같은 느낌이다.
“경제학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자기 강화적(self-reinforcing) 또는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기대라는 말이다. 어떤 기대가 경제주체의 행동을 이끌고, 결국 그 기대감이 현실이 될 때 쓴다. 지금 자기실현 기대가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이 미국 경제와 자본시장이다.”
알 듯 말 듯하다.
“앞서 언급한 토대 덕에 인재도 기업도 기술도 미국으로 몰리지 않나. 당연히 미국 멀티플(기업 가치 산정에 쓰는 배수)이 높을 수밖에 없다. 성장 잠재력이 뛰어난 많은 기업이 뉴욕 증시에서 IPO(기업공개) 하고 싶어한다. 미 증시에 입성한 기업의 높은 수익률은 더 많은 투자자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선순환 구조의 근간이 된다. 만약 올해 미 증시가 안 좋다면, 다른 나라의 증시는 더 안 좋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경제에는 자기실현적 기대가 작동하지 않나.
“작동하긴 하는데, 미국과 정반대다. 우리나라엔 안정적인 일자리가 부족하다.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고, 은퇴 이후 복지 체계는 취약하다. 산업구조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소수 대기업이나 전문직 정도를 제외하곤 선진국 수준의 소득을 얻기 어렵다. 30대에 겨우 취업해 50대 중반에 은퇴해야 하는데, 주택 가격과 자녀 사교육비가 터무니없이 높다. 결국 한국 젊은이의 자기실현적 기대는 초(超)고위험 자산 투자를 통한 ‘대박’ 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 젊은 세대의 해외 투자, 암호화폐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보나.
“당연히 그렇다. 젊은 세대 입장에선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국내 증시에 남을 이유가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미국의 연간 투자 수익률은 7%, 미국 외 시장의 수익률은 4.9%다. 100년 누적치로 보면, 미국에 투자한 이가 다른 나라에 투자한 사람보다 일곱 배 이상 부자가 된다. 미 증시 고점 논쟁은 무의미해 보인다. 다른 나라 증시가 너무 부진해서 딱히 대안도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시장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은 똑똑하고 부지런하다. 자본시장에 참여한 개인 투자자도 그렇다. 한국 증시에서 개인 투자 비중(거래량 기준)이 64%에 달한다. 미국·일본 30%, 독일은 15% 정도다. 주식에 투자한 이들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다. 대출·주택정책이 바뀔 때마다 공부해, 대응한다. 쏠림도 심하다. 어떤 테마가 뜨면,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주식을 사고파느라 바쁘다.”
모르고 투자하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나은 것 같은데.
“맞는 말이지만, 매일 이런 식이면, 불안과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개인이 직접투자 타이밍을 결정하거나 종목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상을 살아가고 투자는 ‘401K’로 잘 알려진 퇴직연금 제도를 통해 간접투자한다. 미 증시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0%다. 가계 자산 중 금융자산 비중이 70% 이상이다. 미국 정부 입장에선 기업 주가 관리가 곧 국민 노후 관리인 셈이니, 자본시장을 철저히 감독한다.”
우리나라도 간접투자 문화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인가.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한국도 고령화와 함께 퇴직연금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당장은 어려워도 투자 문화를 바꿔가야 한다. 생산적이어야 할 경제주체가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가 변동에 일희일비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너무 소모적이다.”
믿고 맡기기엔 우리 자본시장과 기업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투자자 신뢰를 잃은 건 오랜 시간 지배주주 중심으로 움직여 온 기업과 그런 시장을 방치한 금융 당국의 업보다. 당국은 상장 자체가 목표였던 것처럼 상장 후엔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기업을 과감히 퇴출하고, 기업은 주주에게 이윤을 반드시 돌려주고 모든 의사 결정을 주주 자본주의 관점에서 해야 한다. 말하고 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한국에선 당연하지 않다는 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