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宋史)’의 ‘간신열전(姦臣列傳)’에 실려 있는 여혜경의 행적. /홍광훈
‘송사(宋史)’의 ‘간신열전(姦臣列傳)’에 실려 있는 여혜경의 행적. /홍광훈

남의 은혜를 입고 보답하는 것을 흔히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실려 전해지는 고사성어다. 이 책에는 또 영첩(靈輒)의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春秋)시대 진(晉)의 대신으로 조야(朝野)에서 명망이 높았던 조돈(趙盾)은 간언을 잘해 군주의 미움을 샀다. 어느 날 영공(靈公)이 군사를 숨겨 놓고 술자리를 마련해 그를 불렀다. 그가 와서 술을 석 잔 마셨다. 그의 호위 무사 제미명(提彌明)이 군사가 매복돼 있음을 눈치채고, “신하가 군주를 모시고 석 잔 이상 마시면 예에 맞지 않다”면서 그를 부축해 나왔다. 당황한 영공이 맹견을 풀어 물게 했다. 개를 처치한 제미명이 쫓아오는 군사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 그때 군사 중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와 창을 거꾸로 겨누었다. 그의 용맹함을 잘 아는 군사가 대적하지 못했다. 그는 조돈을 호위해 궁을 빠져나왔다. 조돈이 이름을 묻자 그는 “예상의 굶은 사람입니다(翳桑之餓人也)”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돈이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그가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상에서 쉬다가 쓰러져 있는 영첩을 발견했다. 병이 있느냐고 묻는 그에게 영첩은 사흘이나 굶었다고 말했다. 먹을 것을 주자 영첩은 반을 남겼다.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집 떠난 지 3년인데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머니께 드리려 합니다.” 조돈은 음식을 다 먹게 하고 따로 밥과 고기를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홍광훈 -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홍광훈 -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목숨까지 걸고 은혜를 갚으려는 이러한 마음씨와 행동은 칭송받을 만하다. 이와 함께 남의 은혜를 물론 잊지 않지만, 작은 원한까지 크게 보복하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애자필보(睚眦必報)’라 한다. 한 번 흘겨봤다고 꼭 앙갚음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에서 나왔다. 진(秦)에서 출세해 재상이 된 범수가 과거의 은원을 낱낱이 갚은 일을 두고 사마천(司馬遷)이 “밥 한 끼의 은덕도 반드시 갚고, 한 번 흘겨본 원한도 반드시 되돌려주었다(一飯之德必償, 睚眦之怨必報)”고 표현한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의 공손찬(公孫瓚)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됐지만, ‘후한서(後漢書)’의 열전에는 “남의 잘못은 기억하고 착함은 잊으면서 눈 흘김은 반드시 보복했다(記過忘善, 睚眦必報)”고 적혀 있다. 같은 소설에서 촉(蜀)의 법정(法正)도 훌륭한 인물로 등장하나, 정사 ‘삼국지(三國志)’는 “한 끼 밥의 은덕과 눈 흘김의 원한을 갚지 않은 것이 없다(一飡之德, 睚眦之怨, 無不報復)”고 그 냉혹한 일면을 폭로하고 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중국식 표현은 ‘배은망의(背恩忘義)’나 ‘망은부의(忘恩負義)’ 다. 후한(後漢) 말의 여포(呂布)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나관중(羅貫中)은 ‘삼국지연의’ 제5회에서 장비(張飛)의 입을 빌려 여포에게 ‘삼성가노(三姓家奴)’라는 욕설을 퍼붓는다. 우리의 정치판에서도 이 말이 간혹 쓰인다.

여포에 못지않게 배반을 반복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동진(東晉·317~420) 후기의 유뢰지(劉牢之)가 있다. 일찍부터 많은 전공을 세운 그는 군벌 왕공(王恭)이 조정 권신을 응징하기 위해 반기를 들자 그 수하에 들어갔다. 조정을 대표한 사마원현(司馬元顯)이 유뢰지에게 왕공을 토벌한 뒤에 그의 직위를 주겠다고 회유했다. 이에 응한 유뢰지의 배반으로 왕공은 싸움에 져서 붙잡혔다. 형장에서 그는 “내가 사람을 잘 못 믿어, 이렇게 됐다(我暗於信人, 所以致此)”는 말을 남겼다.

사마원현의 밑으로 들어간 유뢰지는 얼마 뒤 또 다른 군벌 환현(桓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정세를 관망하다가 거듭 배반해 그쪽에 붙었다. 이 때문에 사마원현은 붙잡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유뢰지는 환현이 자기를 중용할 줄 알았으나 홀대당했다. 그는 다시 배반해 환현을 치려다 궁지에 몰린 끝에 목을 매 죽었다. 난이 평정된 뒤 환현은 그 관을 부수고 참수했다.

북송(北宋) 후기의 여혜경(呂惠卿·1032~ 1111)도 은혜를 원수로 갚아 후세에 더러운 이름이 전해진다. 그 행적이 ‘송사(宋史)’의 ‘간신열전(姦臣列傳)’에 실려 있다. 동남방의 복건(福建) 출신인 그는 초년에 지방 관리로 있다가 중앙 부서로 발령받았다. 도성에 온 뒤 조정 대신 왕안석(王安石·1021~1086)을 찾아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자기보다 열한 살이 적은 여혜경의 학문과 능력을 높이 산 왕안석은 그를 황제에게 적극 추천했다. “여혜경의 현명함은 당대뿐 아니라 과거의 유능한 인물조차도 이에 비하기 어렵다”면서 “옛 성군의 도를 배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여혜경밖에 없다”고 추켜세웠다. 그 덕분에 여혜경은 단기간에 고속 승진했다. 이후 재상이 된 왕안석이 신법(新法)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했다.

참다못한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황제에게 간언했다. “여혜경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좋은 인재가 못됩니다(惠卿憸巧非佳士). 왕안석으로 하여금 조정 안팎에서 비방을 당하게 한 것은 모두 이 자의 소행입니다(使安石負謗於中外者, 皆其所爲). 왕안석은 현명하지만, 고집이 세고 세상 물정에 어둡다 보니(安石賢而愎, 不閑世務), 이 자가 모사가 되어 일을 꾸미고 왕안석이 밀어붙인 것입니다(惠卿爲之謀主, 而安石力行之). 그래서 세상 사람은 둘을 싸잡아 간교하고 사악하다며 지탄하고 있습니다(故天下並指爲姦邪).” 이에 황제가 이견을 보였다. “여혜경이 조정에서 응대할 때 사물을 명확히 분석하는 것을 보면 훌륭한 인재인 듯하오.” 그러자 사마광은 “여혜경이 물론 학식이 뛰어나고 똑똑하기는 하지만, 마음 씀이 바르지 못하다(用心不正)”고 했다. 그리고 역적으로 이름난 한 무제(漢武帝) 때의 강충(江充)이나 당(唐) 후기의 이훈(李訓) 같은 무리가 애초에 재주가 없었다면 어찌 군주의 마음을 움직였겠냐고 반문했다. 이 말에 황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마광은 왕안석에게도 편지를 보내 충고했다. “아첨하는 자가 오늘날에는 마음에 들어 공을 기쁘게 할 수 있겠지만, 공이 세력을 잃으면 장차 반드시 공을 팔아 제 잇속을 챙길 것이오.” 편지를 본 왕안석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러한 왕안석과 여혜경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공자(孔子)와 그 수제자 안회(顔回)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끈끈했던 이 관계도 왕안석이 여혜경을 추천해 재상자리에 앉히고 물러난 뒤에 틀어졌다.

왕안석이 복귀할까 두려웠던 여혜경은 그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과거 왕안석이 보낸 편지의 은밀한 내용까지 까발려 황제에게 일러바쳤다. 향리에서 만년을 보내던 왕안석은 종이 위에 자주 ‘복건자(福建子·복건 출신의 간사하고 교활한 자)’라고 썼다고 ‘송사’에 기록돼 있다.

여혜경은 결국 불미스러운 일로 지방으로 좌천됐다. 그 뒤 황제가 다시 조정에 불러들이려 하자 소철(蘇轍)이 극력 반대했다. 그를 내칠 것을 청하는 ‘걸주찬여혜경장(乞誅竄呂惠卿狀)’에서 이렇게 말했다. “왕안석은 여혜경에게 날개로 알을 품어준 은혜가 있어 의리상 어버이나 스승과도 같습니다. 여혜경이 자리를 탐할 때는 왕안석에게 아교처럼 달라붙어 하나가 됐습니다(安石之於惠卿, 有卵翼之恩, 有父師之義. 方其求進, 則膠固爲一).” 이어서 “그 권세와 지위가 비등해지자 알력이 생겨 반목하고 물어뜯다가 원수가 됐다” 고 비난했다. 그리고 제 이익을 위해 편지까지 끄집어내어 은인을 모함,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개돼지도 안 하는 짓(犬彘之所不爲)’ 을 버젓이 저지르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며 성토했다. 또한 여포와 유뢰지에 못지않은 이 배은망덕한 자의 흉악함과 사나움과 잔인함이 독사나 전갈과 다름없다고 질타했다.

사람으로 태어나 남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갚지는 못하더라도 배반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판은 물론이고 세상 구석구석에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恩將仇報)’ 일이 예사로 벌어진다. 필자 또한 여러 면으로 배려해 준 후배에게 배반당한 뼈저린 경험이 있다. 교수 재직 시절 40세가 되도록 취직 못 한 그를 다른 교수와 학교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힘겹게 설득한 끝에 뽑아 주었다. 그는 “평생 은인으로 모실 것입니다”라고 여러 차례 다짐했다. 그러나 몇 년도 못 가서 필자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초로(初老)에 겪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인간은 목숨 다하는 날까지 세상 공부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모양이다. 

홍광훈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