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이제 유럽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내 최우선 과제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하게 해 점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다.”
2월 23일(이하 현지시각)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중도 우파 성향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을 승리로 이끈 CDU 대표가 현지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이다. ‘연합’이라고 하지만 CSU는 남부 바이에른주, CDU는 나머지 15개 주에서 활동하며 함께 교섭단체를 꾸리는 사실상 같은 정당이다. 이번 선거에서 CDU·CSU 연합이 630석 가운데 208석을 차지하며 선두에 섰고, 극우 성향 독일을위한대안(AfD)이 152석으로 2위,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이끈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은 120석으로 3위를 차지했다. 이어 녹색당(85석), 좌파당(64석)순으로 의석수가 많았다. 이로써 메르츠 대표의 차기 독일 총리 등극이 유력해졌다. CDU·CSU 연합이 승리하긴 했지만 절대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연립정부(연정) 구성은 불가피하다.
메르츠 대표는 현 집권당인 SPD와 연립정부 협상에 나서 부활절인 4월 20일까지 연정 협상을 마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AfD가 2위를 차지했지만, 나치 독일의 역사적 교훈으로 극우 정당과 연정을 금기시해온 ‘방화벽 원칙’으로 인해 협력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CDU·CSU 연합 주도로 연정이 구성되면 CDU 소속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퇴진 이후 3년여 만에 다시 보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밴스 美 부통령 MSC 연설 이후 태도 급변

메르츠의 ‘미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은 그를 잘 아는 이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 “100번 넘게 미국에 다녀왔다”고 자랑할 만큼 친미(親美)주의자이자 미국과 유럽 간 전통적 동맹의 가치를 중시하는 열렬한 ‘대서양주의자’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는 최신예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를 구입하겠다고 말해 트럼프와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 그랬던 메르츠 대표의 태도가 변화를 촉발한 건 2월 14일에 있었던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뮌헨안보회의(MSC) 연설이었다. MSC는 1963년 창설된 유럽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 안보 회의다. 밴스는 당시 기조연설에서 “유럽에서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후퇴하고 있다. 유럽의 가치를 미국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독일을 겨냥해선 “민주주의는 국민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신성한 원칙에 기초한다. (극우 견제를 위한) ‘방화벽’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고 비난했다. 밴스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독일 정치에 개입하려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메르츠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통한 미국의 핵 보호 없이도 유럽이 스스로 방어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2월 21일 독일 공영방송 ZDF 인터뷰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와 핵을 공유하거나, 최소한 두 나라의 핵 방위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핵무기를 내세워 주도하는 유럽 자강 논의에 합류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2월 24일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메르츠의 총선 승리를 축하하며 “강하고 주도적인 유럽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자산 규모 180억원, 자가용 비행기 2대 보유
사실 메르츠는 트럼프와 닮은 점이 많다. 강경한 반(反)이민, 반중국 정책과 친(親)기업 노선, 탈원전 등 친환경 정책을 비판하는 기조가 특히 그렇다. 메르츠는 극우 AfD와 거리를 두면서도 반이민정책에서는 비슷한 기조를 유지해 왔다. 1월 13일 MSC 행사장 인근에서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하자 “총리로 취임하면 첫날 모든 국경을 통제하겠다”며 초강경 난민 대책을 예고하기도 했다.
두 대의 자가용 비행기를 포함해 약 1200만유로(약 180억5000만원)의 자산을 보유한 부자라는 것도 트럼프와 비슷하다. 메르츠는 50대에 조종사 자격을 취득해 2022년 7월 크리스티안 린드너 당시 재무 장관의 결혼식에는 자신의 전용기를 직접 몰고 참석했다(메르츠가 취임하면 ‘개인 전용기를 보유한 최초의 독일 총리’가 된다). ‘직설 화법’으로 유명하며,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롤 모델이란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메르츠는 트럼프가 전쟁을 시작한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를 탓하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연일 비난한 데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다. 2024년 12월 우크라이나 방문 당시에는 자신이 집권하면 독일의 장거리 미사일 타우루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숄츠 총리는 러시아와 충돌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에 타우루스 지원을 거부해 왔다.
난민 대책, 경제 부활 등 과제 ‘첩첩산중’
CDU·CSU 연합과 SPD는 지금까지 네 차례 걸쳐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난민 대책과 세제, 에너지 전환 등 서로 입장이 엇갈리는 분야가 많아 협상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정치 공백 장기화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는 마련됐다. 하지만 연정 구성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의 앞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가 첩첩산중이다.
이번 총선 승리는 경제난과 이민자 범죄 증가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다. 독일 경제는 21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2023~2024년) 역성장했다. 과거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와 거대한 중국의 수출 시장이 오랫동안 독일 경제의 호황을 견인했는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여파로 에너지값이 급등했고, 중국이 태양광발전과 자동차 등 독일의 주력 산업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국으로 떠오르면서 산업 경쟁력도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CDU가 배출한 헬무트 콜 전 총리(1982~98년 집권)가 그랬던 것처럼 메르츠가 경제를 다시 일으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보수 리더십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계 인맥으로 돈벌이”… 낮은 지지율은 부담
메르츠는 198㎝의 장신이다. 1955년 독일 서부 자우어란트의 보수적인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지역 판사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메르츠가 집권하면 전후 첫 서독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당시 73세) 이후 가장 나이 많은 총리가 된다. 메르츠도 변호사 출신이고 40년 이상 결혼 생활을 함께한 아내 샬럿도 판사다. 슬하에 장성한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메르츠는 스스로 고백하길 일찍부터 술· 담배에 손을 댄 문제 많은 학생이었지만, 고교 시절 CDU에 가입할 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군 복무 뒤 본대와 마르부르크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89년 유럽의회에 선출된 뒤 1994년 독일 연방의회에 입성했고, 정치 거물 볼프강 쇼이블레 전 재무 장관의 도움으로 당내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2002년 정치적 라이벌 메르켈 전 총리와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며 밀려났고, 2009년 정계를 떠났다.
이후 기업 변호사이자 로비스트로 일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글로벌 로펌인 마이어브라운에서 기업 관련 법률 실무를 맡았고, 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에서 4년 동안 근무하며 독일 법인 이사회 의장도 지냈다. 그는 이 시절에 대해 정치권 밖에서 값진 경험을 했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정계 인맥을 이용해 로비하면서 큰 부자가 됐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2018년 메르켈 전 총리가 물러나자, 정계 복귀를 추진했고, 2021년 12월 세 번째 도전 만에 CDU 대표에 선출됐다. 2018년 63세 때 정계에 복귀할 당시 공개한 그의 연간 수입은 약 100만유로(약 15억원)였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부 요직(리더십) 경험이 없다는 건 메리츠의 가장 큰 약점이다. 과거 로비스트 경험 등으로 인해 호감도가 높지 않은 것도 향후 국정 운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ZDF가 2월 14일 공개한 총리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메르츠 대표 지지율은 33%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