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고성과 설전 끝에 파국으로 끝나면서 이를 생중계로 지켜본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트럼프가 빠른 휴전과 희토류 등 전략 광물 개발권을 요구했으나, 젤렌스키는 확실한 안보 약속 없이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향해 “미국에 고마운 줄 알라” “우리가 아니었으면 전쟁은 2주 안에 끝났을 것” 등 막말을 쏟아냈다. 우방국 정상까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트럼프식 강압 외교를 모두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 대통령이 상대를, 특히 동맹국을, 이토록 공개적으로 윽박지르고 비판한 적은 없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1986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에 빗대 이번 회담이 “외교계 체르노빌 사태였다”고 평가했다.

2월 28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 J.D. 밴스 부통령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
2월 28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가운데) 미국 대통령, J.D. 밴스 부통령이 설전을 벌이고 있다/ EPA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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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공개적으로 면박 준 트럼프

회담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 발언이 시작한 지 40여 분이 지난 시점, J.D. 밴스 부통령의 발언이 기폭제가 됐다. “외교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발언에 젤렌스키가 “푸틴은 25번이나 자신의 서명을 어겼다. 도대체 러시아와 무슨 외교를 하자는 것이냐”고 발끈했다. 러시아가 수없이 평화협정을 깨고 크림반도를 비롯해 자국 영토를 불법적으로 침공했으니, 외교적 해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 것이다.

그러자 밴스는 젤렌스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신 나라의 파괴를 멈출 수 있는 외교”라고 응수했다. 발언하려는 젤렌스키 말까지 끊으며 “대통령 집무실에서, 그것도 기자들 앞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개입하려는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트럼프도 가세해 “당신은 쥐고 있는 패가 없다. 수백만 명의 목숨과 제3차 세계대전을 걸고 도박하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장비가 없었다면 전쟁은 2주 안에 끝났을 것이다. 지금 당장 휴전할 수 있으면 받아들여라”라고 다그쳤다. 젤렌스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난 휴전을 원치 않는다. 난 휴전을 원치 않는다” 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회담장 분위기는 냉각됐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주미 우크라이나 대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트럼프는 “이만하면 충분히 본 것 같다. 이건 대단한 TV(쇼)가 될 것”이라며 회담을 끝냈다. 예정돼 있던양국 공동 기자회견과 공식 오찬은 취소됐고, 광물 협정 체결도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젤렌스키는 쫓겨나듯 빈손으로 백악관을 떠났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대통령과 외국 지도자가 공개 석상에서 이렇게 다툰 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무기 지원 중단에 정권 교체 압박까지

전 세계가 회담을 지켜보는 상황에서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윽박지른 것을 두고 CNN은 “철저하게 계획된 정치적 협박이자 함정” 이라고 분석했다. 공개적으로 젤렌스키에게 면박을 주고 체면을 떨어뜨려 러시아와 종전 논의 과정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는 것. 대러시아 제재 완화를 추진하며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노리는 트럼프가 전쟁을 빨리 끝내 가시적인 성과를 챙기고 향후 광물 개발과 재건 사업 특수까지 노리겠다는 포석으로도 풀이된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번 회담을 앞두고 비슷한 사전 작업을 벌여왔다. 2월 18일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빼고 러시아와 종전을 논의했으며, 2월 19일에는 트럼프가 소셜미디어(SNS)에서 젤렌스키를 ‘독재자’라고 부르며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뒤에는 트럼프 측근이 우크라이나에 새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정권 교체론까지 제기했다. 3월 2일 마이클 왈츠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젤렌스키의 사임을 바라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미국과 협상할 수 있고, 결국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트럼프는 급기야 3월 3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미국이 지원하는 탄약, 지대공미사일, 방공망 시스템 등이 끊기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지속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의 군사 드론 운용에 필수인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 지원 중단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회담 파행 후 유럽 국가가 우크라이나에 추가 지원을 약속했지만, 미국의 자리를 메우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백기 투항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로선 미국이 제시한 빠른 종전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흥종 고려대 특임교수는 “자국영토의 5분의 1을 러시아에 뺏기고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도 “우크라이나에 선택권이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자국이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영토가 협상 대상이 아니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영토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거듭된 압박에 젤렌스키는 백기를 들었다. 미국이 군사원조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힌 직후인 3월 4일 젤렌스키는 자신의 SNS에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지속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동의를 전제로 했지만, 구체적으로 포로 석방과 함께, 공중에서 미사일, 장거리 드론, 에너지 및 민간 인프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해상에서는 즉각 휴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도 3월 4일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오늘 젤렌스키 대통령에게서 중요한 서한을 받았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광물 개발 협정에 서명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말했다.

저자세로 돌아선 젤렌스키에 대한 우크라이나 내 여론은 싸늘하다. 올렉산드르 메레시코 우크라이나 의회 외교위원장은 로이터통신에 “그(트럼프)가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AFP통신도 “수도 키이우 시민과 전선의 병사는 충격에 빠지고 배신감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Plus Point

관세·반도체·에너지, 한국에 세 가지 청구서 내민 트럼프

트럼프가 3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
트럼프가 3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회담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3월 4일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도 상관없다는 ‘트럼프식 외교관(觀)’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한국을 불공정 무역국 중 하나로 꼽으며 관세 문제, 반도체 지원금 폐지, 에너지 개발 사업 등을 아우르며 전방위적으로 압박했다. 우선 트럼프는 4월 추진 예정인 상호 관세 대상에 한국을 포함할 것을 시사했다. 수치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한국이 미국에 부과하는 관세가 미국의 네 배 수준”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어 거래 품목의 99% 이상을 무관세로 교역하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이다. 트럼프는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평균 최혜국대우(MFN) 관세율(13.4%)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MFN 관세율은 3.3%다.

트럼프는 조 바이든 정부에서 해외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약속한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칩스법에 따른 보조금이 무산된다면 미국에 공장을 건설 중이거나 착공 예정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피해가 불가피하다. 트럼프는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산업에 한국과 일본이 수조달러를 투자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국 정부가 아직 결정하지 않은 개발·투자 사업에 대해 기정사실인 것처럼 발표한 모양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3월 5일 “아직 결정된 내용은 아니지만, 앞으로 구체화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우영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