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국토의 3분의 2가 산림인 산악 국가다. 후지산(3776m)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험하고 높은 산이 많다. 일본인이 자연을 숭배하는 산악신앙을 가진 것은 이런 지형과 깊은 관계가 있다. 등산 마니아는 죽기 전에 ‘일본 100명산(名山·이하 백명산)’을 오르는 게 평생의 꿈이다.
가장 남쪽에 있는 백명산이 야쿠시마에 있는 미야노우라다케(1936m)다. 야쿠시마는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스미반도에서 60㎞ 남쪽 외딴섬이다. 면적이 504.29㎢로 작은데도 해상으로 불쑥 솟아오른 고산이 즐비해 ‘해상 알프스’로 불린다. 세계에서 가장 수령이 긴 삼나무가 살아 있어 각국에서 트래킹 관광객이 몰려온다. 2025년 2월 24~28일 야쿠시마에서 ‘신의 산(神山)’으로 불리는 ‘못쵸무다케(モッチョム岳)’를 재일 교포 백명산 블로거인 박혁신 F&L 대표의 안내로 올랐다.
못쵸무다케를 신의 산이라고 부르는 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신이 불러줘야 산행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다. 우리 팀도 조몬스기(繩文杉) 종주를 목표로 야쿠시마에 왔으나 예상치 못한 폭설로 못쵸무다케로 방향을 틀었다. 야쿠시마의 해발 500m 이상에 분포하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야쿠시마 고유 삼나무 중 추정 수령 2000~7000년 삼나무를 지칭해 ‘조몬스기’라고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하는 일이 늘 생긴다. 세 번째 야쿠시마 탐방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 말고, 매사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4박 5일간의 야쿠시마 탐방기를 전한다.

야쿠시마, 산악신앙의 성지에 오르다
애당초 목표는 미야노우라다케의 깊은 곳에 있는 조몬스기까지 다녀오는 21㎞ 종주였다. 일본으로 가기 2주 전부터 매일 날씨를 체크한 결과, 체류 기간 내내 맑음이었다. 조몬스기 종주의 기대를 걸고 2월 24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했다. 가고시마에 도착해 보니 활화산 사쿠라지마 정상에 눈이 쌓여 있다. 간밤에 내린 눈이다. 가고시마항에서 두 시간가량 고속선을 타고 야쿠시마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맑지만, 둘러싼 산의 정상이 온통 흰색이다. 야쿠시마의 정남쪽에 있는 사마나호텔에서 폭설로 인해 조몬스기 코스 입산이 금지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주 일정을 2월 25일에서 2월 26일로 늦췄지만 입산 통제가 풀리지 않았다. 호텔 지배인이 조몬스기 대신 못쵸무다케를 추천했다. 3000년이 넘는 스기(삼나무)를 만날 수 있고, 정상 위 풍광이 뛰어나다고 했다.
야쿠시마의 6대 산악 신앙 성지 못쵸무다케
야쿠시마에는 험하고 높은 산이 많아 예전부터 순례객이 많이 찾았다. 참배 대상 산은 못쵸무다케, 유키다케, 미야노우라다케 등 여섯 곳이다. 이 가운데 못쵸무다케가 ‘여성’ 을 상징하는 산이어서 음기가 강하다고 한다. 2월 26일 아침 호텔을 나와 못쵸무다케로 향했다. 등산로 입구에 ‘게지베의 마을’이라는 설명이 있다. 게지베는 야쿠시마 산속에 사는 여성 요괴를 지칭한다. 옛날 사람은 거목을 벨 때 도끼나 톱을 공양하고 신주를 바치며 정중히 의식을 치른 후 벴다. ‘세계 자연유산지역 야쿠시마국립공원 못쵸무다케 등산 입구’ 표지판이 산행 출발점이다. 해발 270m이니, 정상(940m)까지 670m를 올라가야 한다.
출발하자마자 곧바로 오르막 급경사 길이다. 산길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억센 기운이 느껴지는 나무뿌리와 바위 이끼로 뒤덮여 있다. 숨을 헐떡이지만, 몸속 노폐물이 빠져나간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안 됐지만, 평소 비염을 앓던 콧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오르막 내리막길을 쉼 없이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수령 3000년으로 알려진 경이로운 반다이스기(万代杉)가 나타났다.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에서 흰색 빛을 뿜어내 신령스러운 기운이 금방 느껴졌다. 나무 본체에서 뻗은 가지가 산행객의 머리 위로 빽빽하게 펼쳐져 하늘을 가렸다.
동반한 등산객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30여 분 더 올라가면 산행로에서 조금 비켜간 숲속에 못쵸무타로가 숨어있다. 둘레 9m가 넘어 반다이스기보다 수령이 조금 더 됐다. 조몬스기(수령 7500년 추정)에 이어 오래된 야쿠스기로 알려져 있다.

신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주진 않는다
반다이스기에서 1시간 정도 더 오르니 카미야마(神山) 능선에 다다른다. 굽이굽이 겹친 야쿠시마의 산과 남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못쵸무다케까지는 40분을 더 가야 한다. 바다 쪽은 급경사로 깎아지른 수직 절벽이다. 다행히도 경사면에도 숲이 빽빽한 덕분에 그리 위협적이진 않다. 나무가 없으면 정말 아찔한 코스다.
정상을 앞둔 마지막 구간은 내려갔다 다시 오르는 길이라 더 힘들다. 역시 명산은 쉽게 정상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상이 코앞인데, 90도 수직 암벽 구간이라 줄을 잡고 1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갑자기 몸이 굳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평소 위험한 암벽 정상은 가지 않는데, 앞에 가는 여성 등산객이 줄을 잡고 성큼성큼 올라간다. 애써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따라서 올라갈 수밖에.
다리가 떨리지만, 암벽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둘레 5~6m 남짓인 너럭바위여서 서너 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다. 멀리 산자락 아래 산촌과 어촌 마을이 보이고, 그 앞은 푸른 에메랄드빛 남태평양이다. 전후좌우의 절경을 조망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하산길도 험난한 산행의 연속이다. 워낙 가파른 등산로라 내려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운 좋게도 숲속에서 야쿠자루(야쿠시마 고유종 원숭이) 가족을 만났다. 등산로 입구로 돌아오니 오후 5시가 넘었다. 왕복 5.6㎞ 구간인데, 8시간이나 걸렸다. 모두 지쳤지만, ‘신의 산’을 무사히 종주한 만큼 표정이 밝다.
문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야쿠시마에서 4일간 머문 뒤 2월 27일 섬을 떠났다. 원래 목표였던 조몬스기 종주는 다음으로 미뤘다. 그래도 신의 산으로 불리는 못쵸무다케 등정을 무사히 마쳤다. 신은 인간에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주진 않는다. 매사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걸어가고 겸허히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야쿠시마를 다시 찾으면, 신은 조몬스기 종주를 허락해 주실지도….
야쿠시마의 상징 ‘야쿠스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