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 다르예스의 ‘플레이트 I-XXXI’ 표지/ 김진영
리아 다르예스의 ‘플레이트 I-XXXI’ 표지/ 김진영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길가를 유유히 거니는 고양이, 지붕 위를 날아오르는 새, 풀숲을 바삐 오가는 작은 곤충까지,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동물과 마주한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며 우리 환경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람이 잠든 고요한 밤,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을 맴돌고 있을까. 독일 사진가 리아 다르예스(Lia Darjes)는 한밤중에 어린 아기를 돌보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마당에 놓인 테이블 위로 다람쥐 한 마리가 가볍게 뛰어오르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어둠 속에서 찰나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이 작은 동물의 움직임은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 장면을 다시금 카메라로 포착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다르예스는 식사 후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 접시, 와인 잔 등을 일부러 그대로 둬 보았다. 인간이 떠난 자리를 탐색하는 동물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는 순간,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사라질 터였다. 그래서 작가는 움직임이 감지될 때마다 자동으로 촬영하는 모션 캡처 카메라를 설치한 뒤 자리를 비웠다. 동물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생생한 순간을 포착하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플레이트 I-XXXI(Plates I-XXXI)’은 이런 방식으로 음식이 남겨진 마당 테이블을 방문한 동물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리아 다르예스는 식사 후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과 접시, 와인 잔 등을 일부러 그대로 둔다. 그리고 밤새 인간이 떠난 자리를 탐색하는 동물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동
물은 경계심이 많다. 다르예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움직임이 감지될 때마다 자동으로 촬영하는 모션 캡처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리를 비웠다/ 김진영
리아 다르예스는 식사 후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과 접시, 와인 잔 등을 일부러 그대로 둔다. 그리고 밤새 인간이 떠난 자리를 탐색하는 동물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동 물은 경계심이 많다. 다르예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움직임이 감지될 때마다 자동으로 촬영하는 모션 캡처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리를 비웠다/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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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는 꽃병, 반쯤 비어 있는 와인 잔, 컵, 남은 음식, 접시 더미 등이 있다. 이 테이블은 너구리, 다람쥐, 고양이, 박새, 민달팽이, 들쥐, 개미, 참새 등 작은 동물이 마음껏 드나들고 방문하는 일종의 무대가 된다. 다람쥐가 붉은 튤립을 배경으로 녹색 테이블 위에 놓인 수박을 먹고, 작은 새가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를 살펴보는가 하면, 접시로 가득 찬 테이블 위를 고양이가 조심히 지나간다. 누군가 나중에 자신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볼 것임을 알 턱이 없는 이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탐닉하는 데 열중한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은 강한 조명을 활용한 극적인 명암 대비, 밝은 식탁보 위에 놓인 화려한 꽃과 과일 덕분에 네덜란드 황금기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정적인 구도로 치밀하게 연출된 전통적인 정물화와 달리, 다르예스의 사진에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즉 동물이 개입한다. 이들은 통제되지 않은 존재로서, 우연적인 요소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며, 정물 사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작가는 말한다.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은 하룻밤이나 하루, 혹은 며칠 후 카메라를 확인하면서 좋은 사진을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메라로 달려가서 무엇이 담겨 있는지 확인했다. 물론 결과가 안 좋을 때는 실망도 컸다.”

테이블을 찾아온 동물 손님은 다르예스의정물 사진을 기존의 여타 정물 작업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동물 협력자는 어떠한 예상도 통제도 벗어나, 그저 우연히 등장해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남겼다. 이 작업에서 동물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참여자로 역할을 한다. 사진 속 동물은 종종 호기심 어린 표정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테이블 위의 사물을 살피는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움직임과 순간이 카메라에 담긴다.

이 사진은 동물이 인간이 잠든 사이, 인간이 남긴 흔적을 탐색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과 조용히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낮 동안 사람이 모여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던 테이블이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주인공에게 개방된다는 사실은 동일한 공간이 관점과 주체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작가의 마당 테이블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도시의 뒷골목, 공원의 벤치, 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 등 우리 각자가 살아가며 점유하는 공간 어딘가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들은 매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탐색하고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다르예스의 사진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공존을 가시화하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조용히 들춰 보인다.

“정물이 현대 사진에서 죽은 장르로 여겨진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하지만 거기에(죽은 장르라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물은 인간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정물 작업은 우리 사회에 관한 질문을 다룰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물과 재료 그리고 그것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인간의 삶과 환경과 관계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다르예스의 사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동물들의 세계나 사람이 사라진 후 장난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토이 스토리’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독자가 사진가의 테이블 위에서 펼쳐지는 동물들의 비밀스러운 잔치를 엿보게 한다. 

인간이 주인공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 외 존재가 주인공인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더 넓은 생태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이 책은 묻고 있다.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