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 '이코노미조선' 정리
자료 = '이코노미조선' 정리

한진그룹 창업주 고(故) 조중훈 전 회장의 막내아들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한국 주식 부호 1위에 올랐다. 3월 6일 기업 분석 업체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이날 장 마감 기준 조 회장이 보유한 주식 가치는 12조4334억원으로, 이재용 회장의 12조1667억원보다 2.2%(2667억원) 많았다. 

조 회장이 주식 부자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메리츠금융 주가가 최근 1년 사이 60%나 급등한 덕분이다. 조 회장은 메리츠금융 지분 51.25%를 갖고 있다. 반면 이재용 회장의 보유 주식 가치는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주가가 지난 1년간 각각 약 25% 하락하면서 조 회장에게 역전당했다. 

'남은 회사' 받은 막내, 기업 체질 바꾸다

한진가(家) 사남 조 회장은 2002년 보험 증권사 등 한진그룹 내 금융 계열사를 승계받았다. 이미 장남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을, 차남 조남호 회장이 한진중공업, 삼남 조수호 회장이 한진해운을 물려받은 뒤였다. 이를 두고 조 회장은 ‘그룹 내 남은 회사’를 가져왔다고 2015년 ‘포브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조 회장이 물려받은 남은 회사는 20여 년 뒤 나머지 회사보다 훨씬 큰 기업 가치를 가진 회사로 거듭났다. 한진중공업과 한진해운은 사라졌고, 대한항공 시가총액(13일 기준 8조6000억원)은 메리츠금융 시가총액(13일 기준 22조4700억원)의 38.3% 수준이다. 

은행 없는 금융지주사 메리츠금융은 시총 측면에서 기존 금융지주 4강(KB·신한·하나· 우리)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 금융지주 시가총액 순위에서 KB금융지주(30조4600억원)에 이어 2위에 올랐다. 2020년 말 메리츠금융의 시가총액은 5조5000억원 수준이었지만, 2023년 4월 25일에는 우리금융을, 2024년 1월 17일에는 하나금융을 넘었다. 이어 2025년 2월 24일에는 신한금융까지 제쳤다. 

금융가는 메리츠금융의 약진 배경으로 조 회장의 성과주의를 꼽는다. 메리츠(Meritz)라는 회사 이름이 ‘성과주의(meritocracy)’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국식 전문 경영인 모델에 가장 부합하는 기업이 메리츠금융이라는 평가도 있다. 

메리츠금융은 최고경영자(CEO)의 주도 아래 철저한 성과주의를 기반으로 커왔다. 태생은 오너가 있는 재벌가 기업이지만, 조 회장은 ‘한국식 오너’ 자리를 내놓고, 대신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을 전진 배치하는 새로운 기업 문화를 정착시켰다. 조 회장은 재벌가 2세 중 가장 먼저 미국의 성과주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석사과정을 마쳤다.

조 회장은 메리츠금융의 성장 주역으로 꼽히는 김용범 부회장과 최희문 부회장도 직접 영입했다. 김 부회장은 대한생명, CSFB, 삼성화재, 삼성투신운용 등에서 ‘채권쟁이’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최 부회장은 미국 월가 출신 CEO로 조 회장이 삼고초려 끝에 데려왔다. 메리츠금융의 경영 슬로건 중 하나는 ‘회사에 필요한 인재와는 몸값 흥정을 하지 않는다’다. 실제 메리츠금융 계열사 평균 연봉은 업계 최고 수준으로, 2024년 기준 메리츠화재 임직원 평균 연봉은 1억3164만원이다. 메리츠증권의 2024년 상반기 직원 1인당 급여는 1억1317만원으로, 국내 주요 증권사 중 가장 많았다. 

미국식 주주 중심주의가 만든 메리츠 신화

조 회장은 또 한국식 오너의 세습 경영 대신 미국식 주주 중심주의의 길을 택했다. 주가가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일반 주주와 달리 대주주는 주가 상승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기업 가치가 오르면 상속이나 증여 때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나서다.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둬야 하는 대주주가 주주 환원보다 주가를 누르는 걸 더 선호하는 이유다. 주가가 하락할수록 세금을 적게 내고 더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 회장도 처음에는 자녀에게 기업을 승계하는 걸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심 끝에 승계하지 않기로 했다. 국내 기업을 보면 대주주 자녀의 적성이나 본인 희망과 무관하게 회사를 무조건 물려받는 일이 있는데, 조 회장은 이런 관례가 자녀에게도, 기업의 미래에도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 기존의 상속· 증여세 구조에서는 대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 충돌이 발생해 효율적 경영이 어렵다고 봤다. 조 회장은 2019년 말 김 부회장과 최 부회장에게 “자식에게 승계, 포기하겠다. 지배구조 비효율 해소하자”라고 했다. 

조 회장의 승계 포기로 메리츠금융의 밸류업(가치 향상)에 속도가 붙었다. 대표적인 것이 ‘원메리츠(One Meritz)’로 불리는 지배구조 개편 방안이다. 2022년까지 메리츠는 금융지주 밑에 둔 메리츠화재가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메리츠증권이 좋은 투자 딜(deal·거래)을 발굴하는 구조로 사업했다. 그러나 두 회사는 각각 상장돼 있었고, 이 탓에 자금 이동이 제한됐다. 또 내부 통제와 법규 준수 의무로 계열사 간 소통과 의사 결정에도 제약이 있었다. 그 때문에 메리츠화재는 자금을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했고, 메리츠증권은 투자 기회를 날리는 일이 잦았다.

조 회장이 승계 포기를 공식화한 후 경영진은 상장 계열사인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을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조 회장의 금융지주 지분은 79%에서 47%로 줄었다. 메리츠금융은 2023년 4월 통합 출범했는데, 계열사가 대부분의 사업 권한을 가지면서 중요한 사업 문제는 함께 논의하는 현재의 구조를 완성했다. 

경영 효율성을 높이자, 메리츠금융의 주가는 원메리츠 발표 전날인 2022년 11월 18일 2만8050원에서 2025년 3월 13일 11만7800원으로 약 320% 올랐다. 2024년 당기순이익은 전년 대비 9.8% 증가한 2조333억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김 부회장은 2월 19일 2024년 실적 발표회에서 “메리츠금융은 향후 2~3년 이내 연결 당기순이익 3조원을 달성할 것”이라며 “장기간 높은 수익률과 경영진에 대한 신뢰로 장기 투자자 비중이 월등히 높은 버크셔 해서웨이 같은 기업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Plus Point

한때 주식 부호 1위였던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지금은…

한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제치고 국내 주식 부호 1위에 올랐던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 겸 CA협의체 공동 의장의 보유 주식 가치 순위가 4위로 밀렸다.한국CXO연구소가 1월 6일 내놓은 ‘2024년 대비 2025년 연초 기준 주요 그룹 총수 주식 평가액 변동 조사’에 따르면, 김 창업자의 보유 주식 평가액(2025년 1월 2일 종가)은 3조9527억원으로, 2024년 1월 2일 6조1186억원 대비 2조1659억원 줄었다. 국내 44개 기업 총수를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김 창업자 순위는 2024년 3위에서 2025년 4위로 떨어졌다. 

김 창업자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당시 카카오 주가가 17만3000원(2021년 6월 25일 종가)에 달하면서 한국 주식 부호 1위를 기록했다. 삼성SDS 출신의 김 창업자가 삼성전자 회장보다 더 많은 가치의 주식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부각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6개월 전인 2020년 12월 30일 카카오 주가는 7만7900원이었다. 

그러나 카카오는 문어발처럼 늘린 사업에서 발목을 잡혔다. 실적은 부진했고, 주가 역시 우하향했다. 2021년 7월 72조원을 상회하던 시가총액은 현재 19조3300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최근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친 건 김 창업자의 사법 리스크다. 김 창업자는 2023년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 과정에서 시세조종을 지시·공모한 혐의로 2024년 8월 구속 기소됐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나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으나, 회사 주가를 흔들었고 2024년 11월 14일 주가는 52주 최저가(3만2550원)를 기록했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3월 13일 CA협의체 공동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증권가는 주요 현금 창출원인 광고와 커머스 부문 실적 증가가 둔화하고, AI 서비스 고도화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박진우 기자